칼치오 모먼트

[부트발 잡담] 크라이프는 독재자의 팀에서 뛰지 않으려 했는가?

파울리노 하나 2024. 1. 28. 01:26

축구계에서 요한 크라이프라는 존재가 가지는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펠레, 마라도나, 메시와 견주어질 만한 인물이며 그의 가치는 선수라는 틀에 가둘 수 없는 것이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프란츠 베켄바워, 요한 크라이프, 펠레

 

그러나 크루이프는 영향력이 너무 컸던 탓인지, 크루이프의 주변에는 다양한 오해가 따라다니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오해는 정치와 관련된 부분으로 특히 크라이프가 독재를 혐오하기에 레알 마드리드의 구애를 거절하고 바르셀로나로 이적했으며, 아들의 이름을 조르디로 지었으며, 1978 월드컵에 불참했다고 알고 있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

 

오늘은 위의 일화들의 오해를 덜어내 보는 시간을 가져보겠다.


레알 마드리드행 거절 - 독재자의 팀에서 뛰기 싫었다?


 

사실 모든 일의 시작은 1970년으로, 자신을 프로데뷔 시킨 은사이자, 당시 바르셀로나의 감독이었던 빅 버킹엄이 구단에게 크라이프의 영입을 추천한 것이 일의 시작이었다.

 

빅 버킹엄

 

그 일이 있고 얼마 안되어 크루이프는 휴가 기간에 스페인을 여행했는데, 마요르카에선 카를레스 레샤크를 만나 바르셀로나 도시에 대한 어필을 들었으며, 직접 바르셀로나를 여행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에는 아약스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진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때의 인상이 재빠른 바르셀로나 이적결심에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카를레스 레샤크, 요한 크라이프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크라이프는 아약스의 주장 투표에서 절친한 동료이자 선배였던 피트 케이저르에게 밀려난 것이었다.

 

절치한 사이였던 요한 크라이프와 피트 케이저르

 

라커룸 내에서 크라이프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게된 것은 당시 아약스 감독이었던 슈테판 코바치의 자율적인 지도방식 때문이었는데, 안 그래도 리누스 미헐스 감독 아래에서 특별취급을 받은 크라이프는 코바치 감독의 자율을 중시하고 방임적인 성향 때문에 크라이프는 더욱 민감하고 비판적으로 상황을 바라봐야 했다. 덕분에 선수단은 크라이프의 지적질에 지쳐버려 차기 주장으로 케이저르를 뽑은 것이었다.

 

아약스에서 챔피언스 리그 2회 우승을 달성한슈테판 코바치

 

물론 선수의 기량으로선 여전히 아약스 최고였지만, 크루이프의 의견 표출과 피치 위에서 조정해 나가는 능력으로 제기능을 하던 아약스의 축구였기에, 주장직을 달고 있다가 잃어버리며 민심이 흔들린 상황에서 크루이프는 그 전과 같은 역할을 해내기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크루이프는 재빨리 아약스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위까지가 아약스를 떠나는 이유였다면 바르셀로나를 택한 이유는 레알 마드리드는 독재자의 팀이라서가 결코 주된 이유가 아니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오히려 크라이프는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면서도 자국 언론에서 독재자의 나라로 이적한다며 질타를 받았다. 바르셀로나가 아약스에게 세계최고 수준의 이적료를 지불하려 했으며, 세계최고 수준의 대우를 약속했기에 크라이프가 바르셀로나를 택한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와 계약하는 요한 크라이프

 

근본적으로 선수시절 크라이프, 특히 바르셀로나 이적 전의 크라이프는 정치적, 경제적 관심도가 그 정도로 크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가족을 우선시했으며, 그다음이 축구였다. 축구 이외에 가족을 위해 필요한 부분은 장인 로우 코르 코스터에게 맡기다시피 했다.

 

요한 크라이프와 그의 장인 로우 코르 코스터

 

후에 밝히길 바르셀로나에 이적할 때 까지도 프란시스코 프랑코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조르디 크라이프 - 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그렇다면 정치적인 의도 없이 자신의 이익을 좇아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그가 왜 바르셀로나의 반프랑코정서의 상징이 되었을까? 이는 바르셀로나가 그런 목적으로 크라이프를 활용할 마음을 다분히 품고 그를 영입했기 때문이다.

 

크라이프의 이적 과정부터가 프랑코 정책의 맹점을 노린 것이었는데, 당시 프랑코는 자국기업이 국외 기업에 지불하는 액수에 제한을 두는 정책을 시행 중이었지만, 바르셀로나는 세계최고 이적료를 지불하며 크라이프를 농기계로 등록하여 이적료를 지불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챔피언스 리그를 3 연패하고 발롱도르를 수상한 크라이프는 이미 세계적인 스타였고 그 영향력은 프랑코 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수준으로 막대했다. 바르셀로나는 이를 이용해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정치적 탄압과 차별을 국외적으로 알리고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단결시키려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크라이프의 태도와 성격이 바르셀로나의 정치적 의도와 환상적으로 잘 맞아떨어졌다. 크라이프는 정치에 관심이 있진 않았으나 자유와 책임을 중요시 여겼으며,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할 때는 그에 맞서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조르디 크라이프의 이름과 관련된 일화가 그러한 크라이프의 성질을 잘 나타내는 일화다.

 

요한 크라이프 감독과 조르디 크라이프

 

크라이프 부부는 아약스 시절에 암스테르담의 한 병원에서 장녀와 차녀를 낳았고, 1974년에 태어날 조르디 크루이프 또한 암스테르담에서 낳고 싶어 했다. 그러나 출산 예정일인 2월 17일에 하필이면 엘 클라시코 경기 일정이 있었고, 미헐스 감독은 출산을 한주정도 앞당겨주길 부탁했다.

 

크라이프와 그의 아내 대니 코스터는 엘클라시코를 앞둔 미헐스 감독의 부탁을 승낙하며 아이를 앞당겨서 출산했고, 그 덕에 바르셀로나는 레알 마드리드를 5-0으로 격파한다. 경기종료 후 바로 네덜란드로 돌아가 아내의 곁을 지킨 크루이프는 암스테르담에서 조르디의 출생 신고를 마치고 서류를 들고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득남한 크라이프 부부

 

그런데 바르셀로나에서의 등록 과정에서 크라이프는 조르디는 등록할 수 없으며 호르헤만이 등록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조르디라는 이름은 카탈루냐의 성인인 산 조르디에서 따온 것인데, 카탈루냐식 이름인 조르디는 등록 못하고 대신 스페인식 이름인 호르헤를 등록하라는 것이었다.

 

카탈루냐의 성인, 산 조르디

 

크라이프는 자신의 아이의 이름을, 그것도 이미 암스테르담에서 등록된 이름을 등록 못하게 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조르디라는 이름을 등록할 것을 고수했다. 그리고 담당자에게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부당함에 맞섰다. 그렇게 또 다른 크라이프는 우리에게 호르헤가 아닌 조르디로 기억될 수 있었다.

 

이 일화는 훗날 크라이프가 반프랑코정서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일화에서도 오해를 걷어내자면 조르디는 카탈루냐 성인인 산 조르디에서 따온 것까지는 맞으나 그냥 마음에 들어서 조르디로 지은 것이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아들의 이름을 조르디로 지으려 한 것은 아니다.

 

전부터, 크루이프 부부는 아이에게 자국에서의 흔한 이름보다 외국의 이름을 붙이길 선호했다. 첫째 샨탈 크라이프는 프랑스식 이름이었고 쉬실라 크라이프는 인도식 이름이었다. 조르디 또한 출산 전부터 남자아이면 산 조르디의 조르디, 여자 아이면 카탈루냐어로 신의 불이라는 뜻의 누리아로 정해놨었다.

 

조르디 이름 등록 사건으로 인해 크라이프는 조금씩 스페인 정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신과 자신이 펼친 경기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대략적으로 깨닫게 된다.


1978 - 미친 자가 아닌 이상 가족을 택한다.


요한 크라이프가 호르헤 비델라의 군부독재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1978 월드컵에 불참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바르셀로나에서 크라이프가 보여준 자유의 억압과 부당함을 싫어하는 성격과 연관 짓기엔 무리가 있다. 크라이프는 자신의 영향력과 자신이 하는 축구의 영향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누구보다 그 사명과 책임을 짊어지려 하는 성격이 강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크라이프가 월드컵에 불참한 진정한 이유는 월드컵을 앞두고 집에서 괴한의 습격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어찌어찌 가족은 무사했으나, 정신적인 충격은 컸다.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치안 관련 소식도 좋지 않았기에 한동안 경찰관이 크라이프의 집 거실에서 자야 했으며, 방범을 위해 도베르만 두 마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크라이프는 가족을 두고 아르헨티나로 떠날 순 없었다.

 

크루이프 가족 (샨탈, 요한, 조르디, 쉬실라)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의 감독인 에른스트 하펠에겐 컨디션이 안 좋아서 불참한다고 전했다. 경찰이 다른 괴한들도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며 괴한 관련 내용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주의를 줬기 때문이었다.

 

월드컵 결승전 때엔 BBC 스튜디오에서 중계를 하기도 했는데, 상징적인 에이스인 자신이 없음에도 결승전까지 올라간 조국이 아르헨티나에게 무너지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후에 자서전에서 밝히길 자신이 참가했으면 우승했을 것 같다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연장전에서 터진 마리오 켐페스의 골에 무너지는 네덜란드


이 세 일화에 대한 오해는 아마 현시대의 크라이프가 가지는 게으른 천재, 거만한 천재 등의 이미지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오해를 걷어내보고 필자는 크라이프가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분명 어떤 분야에서의 재능적인 측면에서 크라이프를 능가할 인물이 몇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특별함만으로 가득 찬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대우를 잘해주는 곳으로 떠난 것, 가족의 이름을 부정하는 상황에 맞선 것, 명예와 국민보다 가족을 택한 것. 세 일화 속 크라이프의 선택은 어찌 보면 아주 평범하고 정석적이고 인간적인 선택이었다.

 

그렇기에 평범함을 요구하는 그의 평범함이 정치적 상황과 맡물려 그의 비범함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크라이프의 새로운 면이 보이기 시작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