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15

[기삿거리] 오피셜 - 파블로 가비 부상 복귀

바르셀로나의 2004년생 축구 선수 파블로 가비가 장기 부상을 이겨내고 필드로 돌아온다.지난 유로 2024 예선 스페인 대 조지아의 경기에서 십자인대와 반월판 부상으로 인해 시즌 아웃되었던 가비가 한국 시각 기준 21일 4시에 치르어지는 라 리가 10 라운드 세비야전 소집 명단에 포함되면서 공식적으로 부상에서 복귀했다. 2022 골든 보이 수상자인 가비는 경이로운 체력으로 공수 양면을 성실하게 오가며 팀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던 자원인데, 부상의 여파가 이런 가비의 플레이스타일에 영향을 미치진 않을지 지켜봐야 한다. 만약 기량과 성장세가 그대로라면 높은 라인과 강한 압박 강도를 중요시하는 플릭의 바르셀로나에서 탁월한 자원으로 활용될 것이다.

기삿거리 2024.10.20

[기삿거리] 오피셜 - 일카이 귄도안 독일 국가대표 은퇴

독일의 미드필더 일카이 귄도안이 개인 SNS를 통해 국가대표 은퇴 소식을 전했다. 독일 축구에게 몇 주간의 심사숙고 끝에, 이제 국가 대표팀의 경력을 끝낼 때라고 결정했다. 2011년 A대표팀에 데뷔했을 때 꿈도 꾸지 못했던 82번의 경기는 수를 돌아보며 매우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나의 하이라이트는 지난여름 조국에서 열린 유로에서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엄청난 영광이었다! 세월이 지나고, 우리는 마침내 국위선양을 이룰 수 있게 되었고, 내가 그 일부에 기여했다는 것에 행복했었다. 하지만 토너먼트가 시작되기 전에 나는 내 몸뿐만 아니라 내 머리에서도 약간의 피로를 느꼈고, 그것은 나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클럽과 국가대표 경기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 나는 분명히 독일 국가대표팀의 팬으로 남..

기삿거리 2024.08.20

[부트발 잡담] 초라한 춤

8강이 마무리되고 이제 준결승을 앞두고 있는 한 여름의 축구 축제 유로 2024.  16강이 객관적 전력으로 승패를 예상하기 쉬운 대진이었던 반면 8강부턴 유럽 상위권들끼리의 승부이기 때문에 쉽사리 승부를 예측하기 어려운 대진이 만들어졌고, 실제로도 8강은 참가 팀들에게 어려운 경기였다. 골이 터지지 않은 포르투갈 대 프랑스 경기를 제외하면 모든 경기에서 75분 이후에 역전골이나 동점골이 터졌으며 4경기 중 3 경기가 후반전을 갔다. 게다가  2 경기는 승부차기에서 승부를 갈라야 했다.  특히 사람들의 이목을 많이 끈 경기는 독일 대 스페인과 프랑스 대 포르투갈이었다. 두 경기는 우승후보들의 접전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받기도 했으나,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독일의 토니 크로스의 마지막 대회라는 라..

부트발 잡담 2024.07.08

[부트발 잡담] 3월 21일: 축구계의 돌연변이들이 태어난 날

지난 3월 21일에 생일을 맞은 세 축구 선수가 있다. 바로 로타어 마테우스, 로날드 쿠만, 호나우지뉴 가우초다. 신기하게도 이들은 생일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축구 종목의 역사를 통틀어 피치 위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돌연변이라고 불려도 무방할 정도로 명백하게 이질적인 선수였지만 세계 축구의 중심에 위치했던 최고의 선수였다는 점이다. 로타어 마테우스는 독일 국가대표팀과 인테르 나치오날레 밀라노, 바이에른 뮌헨의 전설적인 축구선수로 전포지션에 필요한 덕목을 거의 완벽한 수준으로 갖추고 있던, 말 그대로 만능의 선수였다. 수비적인 역할을 부여받더라도 경이로운 체력을 바탕으로 상대 선수들 사이를 휘젓는 드리블과 정확한 패스, 날카로운 킥을 통해 공격작업의 중심으로서 작용했고, ..

카테고리 없음 2024.03.23

[풋볼리스타 데 호이] 아르헨티나의 가린샤, 오마르 코르바타 - 上편

풀네임: 오레스테스 오마르 코르바타 포지션: 아웃사이드 라이트, 라이트 윙 국적: 아르헨티나 출생일: 1936년 3월 11일 클럽경력: 1955 - 1962 라싱 클루브 1962 - 1965 보카 주니어스 1965 - 1968 인데펜디엔테 메데인 1970 산 텔모 1971 이탈리아 유니도스 1973 - 1974 티로 페더럴 통산 경기: 명확한 자료 없음 (국가대표 43경기) 1936년 3월 11일, 아르헨티나의 시골 마을인 다이로에서 오마르 코르바타가 태어난다. 코르바타의 가정 형편은 불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시골에서 생활 중이었기에 벌이가 시원찮았으며, 코르바타가 5살이었을 해에 코르바타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다. 때문에 어머니를 필두로 코르바타 가족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라 플라타로 이..

[풋볼리스타 데 호이] 잉글랜드 무대 최초의 아이리시 스타, 지미 던 - 下편

上편 - 2024.03.09 - [풋볼리스타 데 호이] - [풋볼리스타 데 호이] 잉글랜드 무대 최초의 아이리시 스타, 지미 던 - 上편 풀네임: 제임스 던 포지션: 센터 포워드 국적: 아일랜드 출생일: 1905년 3월 9일 클럽경력: 1923 - 1925 샴록 로버스 1925 - 1926 뉴브라이튼 1926 - 1934 셰필드 유나이티드 1934 - 1936 아스날 1936 - 1937 사우샘프턴 1937 - 1942 샴록 로버스 통산 경기: 명확한 자료 없음 (국가대표 28경기) 1929-30 시즌이야말로 지미 던 축구인생의 최대 변환점이자, 아일랜드산 득점 기계의 작동 시점이었다. 1929년 9월 7일에 레스터 시티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무승부를 이끌었으며, 1930년 해가 밝은 후엔 ..

[풋볼리스타 데 호이] 잉글랜드 무대 최초의 아이리시 스타, 지미 던 - 上편

풀네임: 제임스 던 포지션: 센터 포워드 국적: 아일랜드 출생일: 1905년 3월 9일 클럽경력: 1923 - 1925 샴록 로버스 1925 - 1926 뉴브라이튼 1926 - 1934 셰필드 유나이티드 1934 - 1936 아스날 1936 - 1937 사우샘프턴 1937 - 1942 샴록 로버스 통산 경기: 명확한 자료 없음 (국가대표 28경기) 1905년 3월 9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링센드에서 지미 던이 태어난다. 어릴 때부터 축구를 즐겼던 던은 파크뷰와 리버사이드 아틀레틱이라는 구단에서 유소년 축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던이 성인 레벨로의 진출을 앞둔 시기에, 아일랜드 남북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공화당 지지 혐의로 아일랜드 자유국에 의해 구금되며 경력이 잠시 단절되었다. 지미 던의 형인 크리스티 던이..

[부트발 잡담] '공격수 출신 감독은 명장이 될 수 없다.' 클린스만이 부풀린 오해

'감독이 공격수 출신인가' 이건 '결승전을 앞둔 라커룸의 분위기가 제 3자의 눈에 얼마나 정돈 되어 있는가' 만큼이나 큰 고려할 가치가 없는 부분이다. 후방 자원의 필드 전체를 바라보는 능력을 강조한 요한 크라이프의 영향인지 대중들이 공격수는 피치 위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인식과 전술적 안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크라이프의 '그 강조'는 어디까지나 피치위에서 후방에 위치한 선수가 가질 수 있는 시야라는 이점을 더욱 활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지. 그 선수의 지도자적 자질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즉 감독의 선수시절 포지션은 결과가 나쁘면 얼마든지 나쁘게 연관지어 볼 수 있고, 결과가 좋으면 얼마든 좋게 연관 지어 볼 수 있는 문제라는 말이다.1. 수적 열세2022년..

부트발 잡담 2024.02.18

[풋볼리스타 데 호이] 페렌츠바로시 특급 라이트백, 노박 데죄

풀네임: 노박 데죄 포지션: 라이트백, 레프트백 국적: 헝가리 출생일: 1939년 2월 3일 클럽 경력: 1955 좀바들리 포스타스 1956 - 1961 좀바들리 할라다스 1961 - 1972 페렌츠바로시 통산 경기: 명확한 자료 없음 (헝가리 국가대표 9경기) 1. 본격적인 탄생 1939년 2월 3일, 베네딕토 수도원의 성 게오르기우스 교회로 유명한 마을인 야크의 한 집에서 노박 데죄가 태어난다. 노박은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즐기며 재능을 드러냈다. 처음에 중앙 공격수로 활약한 그는, 에지하사스랏도크의 1군에서 축구를 시작한다. 노박은 축구와 학업을 병행해 15살에 좀바텔리 기계공대에 입학하여 탄식스 기숙사생이 되었다. 그러나 노박은 축구에 대한 애정이 매우 컸기에 결국 학업을 놓고 본격적으로 축구에 ..

[부트발 잡담] 크라이프는 독재자의 팀에서 뛰지 않으려 했는가?

축구계에서 요한 크라이프라는 존재가 가지는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펠레, 마라도나, 메시와 견주어질 만한 인물이며 그의 가치는 선수라는 틀에 가둘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크루이프는 영향력이 너무 컸던 탓인지, 크루이프의 주변에는 다양한 오해가 따라다니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오해는 정치와 관련된 부분으로 특히 크라이프가 독재를 혐오하기에 레알 마드리드의 구애를 거절하고 바르셀로나로 이적했으며, 아들의 이름을 조르디로 지었으며, 1978 월드컵에 불참했다고 알고 있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 오늘은 위의 일화들의 오해를 덜어내 보는 시간을 가져보겠다. 레알 마드리드행 거절 - 독재자의 팀에서 뛰기 싫었다? 사실 모든 일의 시작은 1970년으로, 자신을 프로데뷔 시킨 은사이자, 당시 바르셀로나의 감..

칼치오 모먼트 2024.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