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네임: 나르시소 호라시오 도발
포지션: 포워드, 윙어
국적: 아르헨티나, 브라질
출생일: 1944년 1월 4일
클럽 경력:
1962 - 1968 산 로렌소
1969 - 1975 플라멩고
1971 우라칸 (임대)
1976 - 1978 플루미넨세
1979 산 로렌
1980 클리블랜드 코브라스
1980 뉴욕 유나이티드
통산 경기: 약 576경기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5경기)
1. 반발과 도발
1944년 1월 4일, 아르헨티나의 수도이자, 남미의 파리로 불리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갈리시아인 레스토랑 주인의 아들로 나르시소 도발이 태어난다.
그는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어머니가 암으로 사망한 후 고아가 되었고, 이로 인해 사회 복지사의 권유로 베네비아스의 가톨릭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가톨릭 학교의 규제와 사제들의 엄한 태도는 도발에게 강한 반발심을 안겨 주었으며, 여덟 살 때부터 도발은 학교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또래 아이들과 축구 그룹을 형성했고, 벌을 받을 때면 그곳에 합류해야 된다는 것을 핑계로 학교에서 벗어났다.
학교에 대한 반발심으로 시작한 축구였지만 도발은 축구를 즐겼으며 재능또한 갖추고 있었다. 산 로렌소에 입단한 도발은 유소년 단계부터 놀라운 활약을 보였는데, 어느 날은 도발이 발부상으로 어쩔 수 없이 골키퍼를 맡았는데, 최후방에서 공을 끌고 올라가 득점을 성공시켰다고도 한다.
1962년, 유소년 단계에서의 비상식적인 활약으로 인해 도발은 18살이란 적은 나이에 산 로렌소의 1군 멤버가 되었다. 그러나 입지를 늘리는 데에서 난관에 부딫히게 된다. 도발은 1부 리그 수준의 팀 조직력에 적응하지 못하며, 영양가 없는 플레이를 보였고 결국 2년이 지나서야 1군 선발 라인업에 뽑히기 시작한다.
2. 더러운 얼굴들과 더러운 구설수
실력이 정상궤도에 오른 도발은 페르난도 호세 아레안, 엑토르 로돌포 베이라, 빅토리오 프란시스코 카사, 로베르토 텔치로 구성된 산 로렌소와 공격진을 이루었고, 이들은 쏟아지는 사생활 구설수와 화려한 활약이라는 스타의 자질로 인해 '로스 카라스시우사스(Los Carasucias, 더러운 얼굴들) '로 불리우며 팬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산 로렌소는 1964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4위를 기록했으며, 1965년엔 6위, 1966년엔 4위를 기록했다.
1967년엔 프리메라 디비시온이 메트로폴리타노와 내셔널로 나뉘어졌는데, 내셔널에서 4위를 차지했다.
우승 트로피는 없었지만 화려한 활약으로 주목받던 도발은 1967년에 아르헨티나 대표팀에 소집된다. 하지만 도발의 국가대표 데뷔가 얼마 안 지나, 팀 이동 중에 승무원을 성추행한 혐의로 국가대표 3인이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3인에는 나르시소 도발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발이 대신 누명을 쓴 거라거나, 수사과정이 부적절했다는 등의 불확실한 점이 많은 사건이지만 어찌 됐든 이 사건으로 인해 도발은 선수 자격정지 1년 처분을 받았으며 국가대표 커리어가 끝난다.
아마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당시 아르헨티나의 최고 지도자인 후안 카를로스 옹가니아의 질서와 규율을 우선시하는 성향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3. 브라질행
그러나, 도발의 선수자격 정지 기간에 아이러니하게도 산 로렌소는 새 역사를 쓴다. 팀(엘바 데 파두아 리마) 감독의 산 로렌소가 아르헨티나 디비시온 역사상 최초로 무패 우승을 달성한 것이다.
그러나 도발은 1969 시즌엔 5경기를 뛰어 4 득점을 기록하며 여전한 재능을 보였다. 브라질의 플라멩구로 둥지를 옮긴 산 로렌소의 팀 감독은 그의 재능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에 플라멩구로 이적할 것을 강하게 권유했고 1971년, 도발은 플라멩구로 이적했다.
그러나 플라멩구는 좀처럼 성적을 내지 못했으며, 1970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의 1라운드(과나바라컵)에서 1위를 차지하긴 했으나, 플라멩구에 유스트리치 감독이 합류하면서 도발을 단순한 골게터로 기용하자 도발과 유스트리치의 관계가 극에 치달았고, 도발이 구단에 임대 이적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도발은 친정 구단인 산 로렌소의 라이벌 구단인 우라칸으로 임대 이적하게 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도발과 산 로렌소에서 한 솥밥을 먹은 사이인 베이라와 알베르토 렌도가 도발과 함께 뛰기 위해 우라칸으로 이적했다.
도발은 우라칸에서 재회하게 된 동료뿐만 아니라 기존의 우라칸을 대표하는 레전드 선수들인 알피오 바실레, 카를로스 알베르토 바빙턴, 미구엘 앙헬 브린디시와 팀을 이루어 아르헨티나 좌익 축구의 거장이 될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감독의 지도를 받게 된다.
그러나 팀은 일관되지 않은 경기력을 보여줬고, 별 다른 성적을 남기지 못한 채 도발은 플라멩구에 복귀한다.
4. 첫 번째 득점왕: 브라질과 사랑에 빠지다
새로이 플라멩구의 지휘권을 잡은 이는 플라멩구의 전설적인 선수였으며, 1970 브라질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던 브라질 최고의 명장, 마리우 자갈루였다.
1972년, 자갈루의 아래에서 도발은 다시 터지기 시작했다. 당시 유망주였던 지쿠는 초반에 도발의 대체자로 기용되었으며, 얼마 안 지나 둘은 피치 위에서 공존하면서 좋은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도발은 플라멩구를 캄오나투 카리오카와 토르네이우 두 포보 우승, 캄피오네 브라질레이루 8강행을 이끌었다. 특히 카리오카에선 16 득점을 기록하며 대회 득점왕을 차지했다.
브라질에서의 생활을 사랑하는 지경에 이른 도발은 이듬해에 브라질 귀화를 신청하게 되었으며 가린샤의 은퇴를 기리는 경기에도 참가하는 등 브라질에 대한 사랑을 표출했다. 그러나 팀의 성적은 지난 시즌에 비해 좋지 않았는데, 이 해의 플라멩구는 카리오카 1라운드에서 1위를 기록했으나, 2라운드에서 탈락해 버렸다.
1974년의 플라멩구는 카리오카에서 우승과 브라질레이루 6위를 기록했으나, 아쉽게도 도발은 카리오카의 결승전에 참가하지 못했다.
5. 두 번째 득점왕: 삼색의 기계
1975년, 플라멩구는 점점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라이벌 구단 플루미넨시의 당시 회장이었던 프란시스쿠 오르타는 플라멩구와의 교류를 제안한다.
플루미넨시는 토니뉴 바이아노, 호베르투 데 올리베라 산투스, 제 호베르투를 플라멩구로 이적 보냈으며, 플라멩구는 나르시소 도발, 로드리게스 네투, 레나투 다 쿠냐를 플루미넨시로 이적 보냈다. 이제 나이가 30줄이 넘은 도발을 처분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도발은 플라멩구의 예상과는 달리 30줄에도 탁월한 활약을 보일 수 있는 선수였다. 호베르투 히벨리누, 마르코 안토니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핀티뉴,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레스, 만프리니, 부팔루 길, 파울루 세자르 카주, 에디뉴로 이루어진 화려한 스쿼드는 얼마 안 가 브라질 최고의 팀으로 팬들에게 인정받으며, '마키나 트리콜로(Máquina Tricolor, 삼색의 기계)'로 불렸다.
마키나 트리콜로의 화력은 막강했고, 플루미넨시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를 우승했으며, 도발은 카리오카에서 무려 20 득점을 기록하며 다시 한번 득점왕을 수상했다. 이 시즌의 플루미넨시는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준결승까지 진출하지만, 준결승에서 코린치안스에게 승부차기에서 패배했다. 이 경기가 '코린치아나 침공(Invasão corintiana)'이란 이름으로 유명한 경기였다. 우승을 하진 못했으나, 대회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도발은 실버볼을 수상했다.
추가로, 이 시즌 플루미넨시는 파리 토너먼트에서 유럽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는데, 당시 유럽 스쿼드엔 롭 렌센브링크, 두두 게오르게스쿠, 빔 수르비어, 빌럼 반 하네엄 등의 쟁쟁한 선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도발은 브라질에서 가장 위협적인 공격수 였으며, 이듬해에도 도발은 지난 시즌의 페이스를 유지한 채 일관된 경기력을 보였지만 플루미넨시는 친선 토너먼트인 테레사 에레라만을 우승했으며, 카리오카와 브라질레이루에선 각각 3라운드 탈락, 2라운드 탈락이란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었고, 도발은 결국 플루미넨시를 떠나게 된다.
6. 은퇴
친정 구단인 산 로렌소로 이적한 도발은 이번엔 아르헨티나 우익 축구의 상징이 될 카를로스 빌라르도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산 로렌소는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고, 팀의 재정적인 문제가 악화되어 버리는 바람에 도발은 친정팀마저 떠나야 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도발이 아르헨티나 축구의 좌익과 우익의 상징인 메노티와 빌라르도의 지도를 받았으면서도 그들의 성공적인 순간을 단 한 번도 겪진 못했다는 점이다. 이 둘은 훗날 월드컵 트로피를 거머쥐는 감독이 된다.)
산 로렌소도 떠나게 된 나르시소 도발은 미국으로 향했고, 클리블랜드 코브라스와 뉴욕 유나이티드에서 얼만 안 되는 기간을 활약하고 은퇴하게 된다.
나르시소 도발은 스타의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커리어 초기의 도발은 화려한 실력과 수려한 외모, 경솔한 사생활로 유명했지만, 일찍이 커다란 사건을 겪으며 이후 도발은 이를 고쳐내며 30대에도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는 선수가 되었다.
도발은 득점만을 해내는 선수는 아니었으며, 돌파와 슛에 능해, 개인 능력을 이용해 공간을 만들어내고 득점기회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춘 만능 공격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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