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타 데 호이

[풋볼리스타 데 호이] 신이 내린 대가, 도밍구스 다 기아

파울리노 하나 2023. 11. 19. 23:29


 

풀네임: 도밍구스 안토니우 다 기아

포지션: 센터하프, 센터백
국적: 브라질
출생일: 1912년 11월 19일

클럽 경력:
1929 - 1932 방구
1932 바스쿠 다 가마
1933 나시오날
1934 - 1935 바스쿠 다 가마

1935 - 1936 보카 주니어스

1936 - 1943 플라멩구

1943 -1947 코린치안스

1948 - 1950 방구
 
통산 경기: 명확한 자료 없음(브라질 국가대표 30경기)



1. 그들을 잠재우기 위해 필요한 것


1912년 11월 19일,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도밍구스 다 기아가 태어난다. 건장한 체구와 탁월한 운동능력을 지니고 있던 이 소년은 또래 아이들과의 축구를 즐겨했으며, 이윽고 축구 선수를 꿈꾸게 된다.

 

사실, 다 기아가 태어났을 때의 브라질은 '축구 강국' 과는 거리가 있었던 국가였으며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깊이 박혀 있었기에, 흑인들이 축구를 하게 된 지도 몇 년 안 지난 때였다. 덕분에 다 기아도 어린 시절 여러 차례 인종차별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다 기아의 집안 형편은 결코 부유하다곤 볼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다 기아는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추지도 못하고 잔디 하나 자라지 않은 공터에서 축구를 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직물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묵묵히 축구를 해온 다 기아는 1929년에 방구에 입단하며 축구 선수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축구 선수라는 목표에 도달한 다 기아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또 다른 관문이었다. 다 기아는 구단 안에서 일어나는 인종차별을 목격하고, 경험했다. 다 기아는 그 들을 잠재워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떠안았다.

 

 

아마 이 과제가 다 기아의 플레이스타일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다 기아 때의 축구는 후방의 인원들은 공을 뺏어내고 롱킥을 찰 뿐이었고, 전방에 있는 인원의 돌파 능력이 숭배되는 시기였다. 그런데, 다 기아는 후방에 배치된 선수였음에도 공을 뺏고선 상대 선수를 드리블로 완벽하게 제쳐내며 안정적인 공격전개를 이끄는 플레이를 즐겼다. 이는 분명 수비의 기존 역할과는 동 떨어진 것임과 동시에 돌파 능력에 대한 어중간한 자신감으론 결코 나올 수 없는 플레이였다.


2. 남미를 평정한 수비수


이윽고 사람들은 다 기아의 가치를 깨달았고, 숭배하기 시작했다.

 

국가대표까지 데뷔한 다 기아는 방구에서의 3년 생활을 끝마치고 '바스쿠 다 가마'라는 포르투갈의 탐험가의 이름을 딴 구단으로 이적했다. 그곳에서 1년을 보내며 1934년 토르네이오 이니시우(리우데자네이루 챔피언십) 우승에 공헌한 뒤, 다 기아는 브라질을 벗어나 우루과이로 탐험을 떠나게 된다.

 

 

우루과이의 강호인 나시오날로 이적한 다 기아는 당대 최고의 수비수로 평가받는 호세 나사치와 함께 최강의 요새를 구축해 1년간 활약하며 명성을 드높였고,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을 이끌었다. 이 시기에 다 기아가 얻은 별명이 '신이 내린 대가(Divino Mestre)'.

호세 나사치와 도밍구스 다 기아

 

나시오날의 팬 중엔 나사치가 있음에도 다 기아를 영입한 것은 사치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이들 중 대부분도 다 기아가 떠난 뒤엔 그의 빈자리를 체감했다.

 

 

우루과이를 정복한 다 기아는 다시 브라질 국가대표의 관심을 받게 된다. 다 기아 또한 이 관심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브라질 국가대표로 활약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당시 브라질엔 자국 인재의 해외 진출을 막기 위해 외국에서 활동 중인 선수를 국가대표에 합류시키려면 수수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기에, 다 기아는 국가대표에 합류하지 못했다.

 

다 기아는 국가대표와 관련된 문제의 해결 가능성을 보기 위해 바스쿠 다 가마로 돌아갔다. 다 기아는 팀을 1934 캄페오나투 카리오카(리우데자네이루주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다 기아의 바스쿠 다 가마는 시즌 중 단 2패만을 기록했다.

 

 

브라질에서의 정비를 마친 다 기아의 다음 행선지는 아르헨티나였다.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스에 입단한 다 기아는 이번엔 빅토르 발루시라는 아르헨티나 정상급 수비수와 수비진을 이루었고, 곧장 자신의 영향력을 드러냈다. 1935 프리메라 디비시온을 우승한 이 시즌의 보카는 34경기에서 3패만을 기록했으며 98 득점 31 실점이란 놀라운 활약을 보여줬다.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까지 우승하며 다 기아는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의 최상위 리그를 모두 정복한 수비수가 되었다. 그러나, 우승 다음 시즌 초반에 심판과 말다툼을 벌인 다 기아는 2개월 동안 선수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고, 아르헨티나 리그 심판의 질에 실망해 브라질로의 이적을 희망하게 되었고, 또다시 브라질로 복귀하게 된다.


3. 브라질 정착


다 기아에겐 플루미넨시, 방구, 아메리카, 플라멩구 등의 선택지가 있었는데, 그의 선택은 플라멩구였다. 플라멩구로 이적한 다 기아는 첫 시즌부터 팀을 1937 타사 다 파즈 우승으로 이끌며 좋은 활약을 보였다.

 

다 기아의 플라멩구 이적은 무엇보다 1938 프랑스 월드컵을 앞둔 시기에 브라질 대표팀에 합류해 준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1938 브라질 대표팀

 

그리고 다 기아는 월드컵에서 기대에 부응하는 활약을 보이며 브라질의 준결승 진출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러나, 준결승에서 경기가 중단된 상황에서 이탈리아의 실비오 피올라에게 보복성 반칙을 범했다가 이것이 페널티킥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이탈리아의 득점으로 연결되면서 다 기아는 팀의 패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선수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브라질 대표팀은 3, 4위전에서 승리하며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3위라는 성과를 기록했기에 팬들에게 환호받았으며, 다 기아는 대회 베스트 XI에 선정되었고, 팬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월드컵 후에 플라멩구에 안착한 다 기아는 전성기를 플라멩구에서 보내게 되었다.

 

 

1939년엔 12년 만에 캄피오나투 카리오카의 우승 타이틀을 플라멩구에 안겨주었으며, 레오니다스 다 시우바, 아구스틴 발리도, 지지뉴 공격라인이 만들어진 1942년에는 27경기 20승 5 무 2패와 함께 87 득점 29 실점으로 리그 최다 득점과 최소 실점을 기록하며 카리오카를 우승했고, 1943년에도 18경기 11승 6 무 1패와 함께 51 득점 18 실점으로, 리그 최소 실점을 기록하며 카리오카 2연패를 달성했다.

 

도밍구스 다 기아의 생일을 기념해 플라멩구 공식 트위터에 올라온 사진

 

플라멩구에서의 전성기가 지나고, 어느덧 32살이 된 다 기아는 플라멩구 이사회와의 의견 충돌로 인해 코린치안스로 이적하게 된다. 그리고 1945 코파 로코(지금의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해 브라질을 준우승으로 이끌며 대회 MVP에 선정되었다.

 

코린치안스에서의 다 기아는 전성기만큼의 속도는 점차 잃었으나,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팀에 큰 도움을 주며 1948년까지 활약한다.

 

 

커리어 황혼기에 접어든 다 기아는 코린치안스와의 동행을 끝내고 자신의 축구 커리어 시작점인 방구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시즌 간 활약한 후 38의 나이로 축구선수를 은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