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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 마누엘 페레이라
포지션: 포워드
국적: 아르헨티나
출생일: 1905년 10월 22일
클럽 경력:
1921 - 1924 클루브 아르헨티노
1924 - 1933 에스투디안테스
1933 - 1935 리버 플레이트
1935 - 1936 에스투디안테스
통산 경기: 명확한 자료 없음(아르헨티나 국가대표 21경기)
1. 라 플라타의 교수님들
1905년 10월 22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부터 서쪽으로 약 450km 떨어진 도시인 트렌케 라우켄에서 마누엘 페레이라가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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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이후, 아르헨티나는 비옥하고 넓은 경작지를 앞세워 상당한 부를 쌓으며 1인당 국내총생산이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뽑히기에 이르는 대부국이 되었다. 이러한 국가의 경제적 여유와 1차 산업의 발달은 필히 노동자 문화의 발달을 가져왔고, 그중 하나가 축구였다.
페레이라 또한 이 시기에 축구를 시작한 '황금세대' 중 하나였다. 16살에 트렌케 라우케를 연고지로 하는 클루브 아르헨티노에서 축구 경력을 시작한 페레이라는 3시즌을 활약하고 19살 무렵에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 플라타로 팀을 옮긴다.
페레이라는 라 플라타에서 알레한드로 스코펠리, 알베르토 조자야, 미구엘 앙헬 라우리, 엔리케 과이타 함께 공격진을 이루었는데 이들의 파괴력이 대단했다. 이 5인의 공격진은 경기장 안에서 센스 있고 지능적인 플레이에 능통했으며, 경기장에 입장할 때에 파란색 블레이저를 입고 입장했기에 팬들에게서 '로스 프로페소레스'(Los Professores, 교수들)라고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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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섬세한 볼 컨트롤 능력과 정확한 패스를 통해 라 플라타에서 다양한 기회들을 생산해냈던 페레이라는 1927년에 아르헨티나 국가대표에 승선하며 코파 아메리카 우승에 기여하며,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도 주장으로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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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대회 아르헨티나 첫 득점은 16강 미국전에서 전반 9분에 터진 페레이라의 득점이었다. 그 득점을 시작으로 멈출 줄 모르는 페레이라의 득점행진이 시작되었다. 페레이라는 모든 경기에서 득점해 내며 미국을 11-2로, 벨기에를 6-3으로, 이집트를 6-0으로 무너뜨려 조국의 올림픽 결승행에 공헌했다.
결승에서 아르헨티나가 만난 상대는 엑토르 스카로네가 이끄는 '남미 최강' 우루과이였다. 경기 시작 23분 만에 우루과이의 페드로 페트로네 스키아보네가 선제 득점을 터뜨렸으나, 페레이라가 50분에 또다시 득점에 성공하며 승부를 원점으로 만들며 경기 무승부를 이끌었다.
무승부로 인해 치루어진 재경기 플레이오프에선 우루과이에게 패배하며 준우승을 기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승 플레이오프 단 한 경기를 제외한 모든 경기에서 득점포를 가동하며 6득점을 터뜨린 페레이라는 해당 대회 공동 득점 2위이자 대회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다.
3. 국가대표에서의 눈부신 활약과 은퇴
1929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3득점을 기록하며 국가대표에서의 좋은 활약을 이어 나갔으며, 1930 우루과이 월드컵에도 참가했으나 아르헨티나는 결승에서 스카로네의 우루과이에게 또다시 패하며 준우승의 쓴맛을 느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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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이라는 기예르모 스타빌레와 카를로스 페우셀레라는 막강한 공격수들에게 찬스를 내어주는 것에 집중했기에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음에도 대회 올스타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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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후 1933년엔 리버 플라테로 이적해 두 시즌 간 활약했고 다시 라 플라타로 복귀하고 한 시즌 뒤에 은퇴하게 된다.
라 플라타의 '교수님들' 중 하나였던 마누엘 페레이라는 팀을 구원할 수 있는 높은 순도의 득점포와 섬세한 드리블과 찬스메이킹을 갖춘 선수였다. 당대에 페레이라의 기술력을 표현한 탱고가 생겨날 정도로 아름다운 기술을 구사했다.
흥미로운 점은, 교수라는 별명과 어울리는 것은 피치 안에서 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인데, 법학부에서 공부했으며 은퇴 후엔 스포츠 칼럼리스트이자 언론가라는 지식인의 행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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