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타 데 호이

[풋볼리스타 데 호이] 바스크 특급 언성 히어로, 욘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파울리노 하나 2023. 10. 21. 13:04


풀네임: 욘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라사

포지션: 라이트 윙,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포워드, 라이트 백 
국적: 스페인
출생일: 1965년 10월 21일

클럽 경력:
1983 - 1985 오사수나 B
1985 - 1988 오사수나
1988 - 1994 바르셀로나
1988 - 1990 레알 소시에다드 (임대)
1994 - 1997 아틀레틱 빌바오
1998 요코하마 마리노스
1998 - 1999 오사수나
 
통산 경기: 약 409경기 이상



1. 오사수나의 신성


1965년 10월 21일, 바스크의 중요 성지인 팜플로나에서 욘 안도니 고이코에체아가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재능을 보인 고이코에체아는 팜플로나를 연고지로 하는 CA 오사수나의 유소년팀에서 축구를 시작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 고이코에체아가 오사수나 B팀에서 20살을 앞두고 있었을 무렵에 오사수나 1군 팀에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바로 라 리가 6위를 기록하며 UEFA 컵 진출권을 따낸 것이었다.

그전 시즌만 해도 강등 구단들을 제외한 라 리가 구단 중 꼴등이었던 오사수나임을 고려하면 정말 충격적인 결과였다. 이는 당시기준 오사수나의 역대 최고 성적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다음 시즌부터 고이코에체아가 오사수나의 1군 선수로 활약하게 된다.

오사수나의 유망주였던 고이코에체아

고이코에체아는 첫 시즌인 1985-86 시즌부터 20경기 이상의 적지 않은 기회를 받았으며 두 번째 시즌엔 라 리가 전 경기에 출전해 8득점을 기록하며 바스크 신성의 등장을 알렸다. 놀라운 상승세를 보이던 고이코에체아는 세 번째 시즌엔 리그에서  11득점을 올리며 자신의 폭발력을 과시했고, 오사수나를 5위로 이끈다. 자신이 B팀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세워진 오사수나의 최고 성적을 갈아엎은 것이었다.

고이코에체아와 마이클 로빈슨

이러한 고이코에체아의 뛰어난 활약상을 보고 상위 규모 구단들은 고이코에체아에게 흥미를 느꼈고, 고이코에체아는 결국 오사수나보다 더 큰 규모의 구단이며 호셉 루이스 누녜스 회장의 정책 아래에서 바스크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쏟고 있던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게 된다.


2. 수단으로써 활용되다


23의 나이에 바르셀로나 소속이 되었으나, 그가 블라우그라나의 일원으로서 활약하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바르셀로나에 입단하자마자 친정팀인 오사수나와 마찬가지로 바스크 지역을 연고로 하는 라이벌, 레알 소시에다드로 두 시즌 동안의 임대 생활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바르셀로나가 같은 시즌에 영입한 레알 소시에다드의 주축 바스크인 호세 마리 바케로와 치키 베히리스타인 때문이었다.

바케로와 베히리스타인을 한 번에 잃어버리는 것은 레알 소시에다드 입장에선 대손실이었기에 이적이 성사되기 힘들었고, 바르셀로나는 고이코에체아를 소시에다드로 두 시즌 간 임대 보내는 것을 대가로 그 둘을 영입했던 것이다.

즉, 바르셀로나가 고이코에체아 영입의 이유는 선수가 지닌 기량의 가치도 있겠으나, 바케로와 베히리스타인 영입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영입한 면이 컸다는 것이다.

루이스 로페스 레카르테, 바케로, 베히리스타인

당시 오사수나의 회장이자 오사수나 역대 최장기 집권 회장인 페르민 에스쿠라는 이적을 성사시키기 전부터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고, "안타깝다. 고이코에체아에겐 바케로나 베히리스타인 정도의 가치가 있다."라고 말하며 고이코에체아의 이적과 대우에 대한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페르민 에스쿠라 회장

 
그러나, 고이코에체아는 레알 소시에다드 임대 기간 동안에도 좋은 활약을 펼쳤다. 빠르게 라 레알의 주전으로 자리 잡았고 두 시즌동안 리그 두 경기만을 결장하며 팀에 헌신했으며 두 번째 시즌에 리그 5위를 기록하며 UEFA컵 진출권을 획득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3. 바르셀로나의 언성 히어로


그렇게 두 시즌이 지나고 블라우그라나의 일원이 된 고이코에체아는 바케로, 베히리스타인, 훌리오 살리나스 등의 바스크 출신 선수들과 함께 뛰어난 전술적 이해도를 바탕으로 크라이프 감독에게서 높은 신임을 얻어냈다.

고이코에체아, 알베르트 페레르, 안도니 수비사레타

물론 당시 드림팀의 스타였던 이들을 밀어내며 주전자리를 차지하진 못했지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듯 첫 시즌부터 놀라운 활약을 활약을 펼치며 거의 전경기에 출전한 고이코에체아는 돈발롱 선정 1990-91 시즌 라 리가 최우수 스페인 선수로 선정되었으며 이 시즌에 스페인 국가대표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고이코에체아는 이후에도 바르셀로나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조커 혹은 언성히어로로서 팀에 헌신적인 태도와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며 라 리가 4회 연속 우승과 바르셀로나의 첫 유러피언 컵 우승에 공헌했다.


4. 귀향


1994 미국 월드컵에선 8강 문턱에서 아르마다의 침몰을 막진 못했으나, 조별리그에서 대한민국과 독일을 상대로 득점을 터뜨리며 조국의 16강 진출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30대를 앞두고 바르셀로나에서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1994 WC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득점에 성공하며 환호하는 고이코에체아

고이코에체아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고, 바스크 최대 명문인 아틀레틱 빌바오로 이적한 고이코에체아는 세 시즌동안 활약한 뒤엔 당대의 이름값있는 다양한 외국인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던 J리그로 떠나게 된다.

J리그 요코하마 마리노스에서 활약하던 고이코에체아

요코하마 마리노스에서 한 시즌을 활약한 후엔 고향인 팜플로나로 향했고, 오사수나에서 은퇴하며 자신의 축구 커리어와 인생의 출발점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된다.


욘 안도니 고이코에체아는 압도적인 재능의 온더볼 기량을 지닌 선수는 아니었으나, 지치지 않는 체력과 함께 전술적 이해도와 유틸리티 능력을 지니고 있어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팀에게 위해 활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측면에 배치되었을 때의 능숙한 페인팅과 센터링이 날카로웠다.

고이코에체아와 미카엘 라우드럽
고이코에체아와 로날드 쿠만, 호마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