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타 데 호이

[풋볼리스타 데 호이] 축구사 최초의 스타, 빌리 메레디스

파울리노 하나 2023. 7. 31. 05:50


풀네임: 윌리엄 헨리 메레디스

포지션: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국적: 웨일스
출생일: 1874년 7월 30일

클럽 경력:
1890 - 1892 처크
1892 - 1894 노스위치 빅토리아
1894 렉섬
1894 처크
1894 - 1906 맨체스터 시티
1906 - 192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21 - 1924 맨체스터 시티
 
통산 경기: 명확한 자료 없음(웨일스 국가대표 48경기)



1. 광산마을 처크


1874년 7월 30일, 웨일스 덴비셔의 작은 광산마을, 처크에서 빌리 메레디스가 태어난다. 메레디스는 12살에 구덩이 조랑말 마부직을 시작했다. 광산마을 출신인 만큼 메레디스의 첫 직업은 축구가 아닌 광산과 관련된 직업이었던 것이다.

메레디스의 형제들은 모두 축구를 했는데, 특히 맏형이었던 엘리아스 메레디스는 영국의 주요 철도 회사이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뿌리인 랭커셔 요크셔 철도 회사에서 기관사 일을 하고 있었기에 메레디스는 어린 시절부터 에버턴을 비롯한 프로 축구팀을 볼 수 있었고 그 영향으로 메레디스 또한 프로 축구선수의 길을 꿈꾸게 된다.
 
학교에서부터 빼어난 축구 실력을 자랑하던 메레디스는 1890년에 형제인 사무엘 메레디스를 비롯한 광산 노동자들로 구성된 지역 아마추어 축구팀 처크 AAA에 입단하며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시엔 아마추어 축구팀도 수준이 높은 경우가 있었으며 처크는 1987년과 1994년 사이에 웨일스 컵을 다섯 번 우승할 정도의 강팀이었다.

게다가  처크에서 활약하던 빌리 메레디스의 두 살 위의 형인 사무엘 메레디스는 빌리의 입단  1 시즌 뒤에 스토크 시티로 이적해 풀백으로 활약하는 프로 축구선수가 되었단 것을 고려해보면 프로 축구와의 수준 차이가 크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빌리 메레디스의 처크 생활은 순탄하진 않았다. 광산에서 근무하며 메레디스는 임금의 25%가 삭감되는 등 부당한 대우를 견뎌내야했고, 이로 인해 일어난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 때문에 1893년엔 웨일스 리그에만 참가했다. 생계를 지켜야 했던 메레디스는 1992년 당시 풋볼리그에서 탈퇴하며 고생 중이었던 노스위치 빅토리아, 렉섬, 처크 세 팀을 잠시 병행하기까지 한다.
 
처크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 메레디스는 특히 전 웨일스 국가대표였던 인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윌리엄 오언과 좋은 궁합을 보이며 1893-94 시즌 웨일스 컵 우승을 이끌었다.
 
반면 노스위치 빅토리아는 메레디스의 뛰어난 활약에도 1993-94 시즌 풋볼리그 2부에서 3 경기만을 승리했고, 풋볼리그에서 퇴출되었다.


2. 맨체스터 시티로


그러나 메레디스의 활약을 눈여겨본 구단은 여럿 있었다. 그중에 메레디스에 대한 관심이 잘 알려진 두 구단이 있는데, 하나는 전 처크 선수였던 풀백, 디 존스가 뛰던 볼턴 원더러스였다.

디 존스

디 존스는 메레디스의 활약을 보고 볼턴의 비서관(당시엔 지도자가 이사진 일과 경기내적인 일을 겸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감독은 Cecretary(비서관)이라 불렀다.)인 존 제임스 벤틀리에게 메레디스 영입을 추천했다. 그러나 벤틀리는 메레디스가 경험이 적고 체구가 왜소하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메레디스의 입단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구단이 풋볼리그 2부의 맨체스터 시티였다. 당시 맨체스터 시티의 이사진이었던 로렌스 퍼니스는 노스위치의 경기를 통해 메레디스의 재능을 발견했고 메레디스의 영입을 강하게 추진한다.

로렌스 퍼니스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이 메레디스와 접촉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이었다. 메레디스를 만나기 위해 비서관 조슈아 팔비와 구단 관계자 한 명(퍼니스란 말도 있으며 존 채프먼 회장이란 말도 있다.)은 웨일스로 향했는데, 현지인들이 다짜고짜 두 사람을 쫓겨내 버렸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좋지 않은 관계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메레디스와 함께 광산에서 근무하는 동료들에게 음료수를 사주는 방식으로 현지인들에게 신뢰를 얻어내고 나서야 메레디스와 접촉할 수 있었다.
 
접촉 후의 입단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맨체스터 시티와 접촉한 메레디스는 자신의 고향, 처크에 대한 사랑과 프로 축구선수가 되는 꿈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게다가 메레디스의 어머니는 아들이 광산에서 일하고 여가시간에 축구를 하길 바랐다. 당시 축구선수 직업의 수익이 안정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생각이었다. 이 때문에 메레디스의 갈등은 더욱 심해진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하던가, 결국 메레디스는 맨체스터 시티와 계약하게 된다. 그러나 메레디스 또한 부모님의 생각과 뜻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곧장 광산 노동자직을 내려놓지는 않았다. 때문에 메레디스는 맨체스터 시티에서 1년 정도의 기간 동안 경기전후로 광산에서 일하는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게 된다.


3. 축구사 최초의 슈퍼스타


1894년 11월에 맨체스터 시티 선수로서 데뷔한 곧장 뛰어난 활약을 보이기 시작한다. 데뷔한 지 한 주 뒤에 생애 첫 맨체스터 더비를 치르게 되었다. 뉴튼 히스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불리기 시작한 후의 첫 번째 맨체스터 더비였다. 해당경기 맨체스터 시티는 2-5로 패했으나, 메레디스는 2 득점을 기록하며 팬들에게 기대감을 불어넣었다.

 
메레디스는 데뷔시즌인 1894-95 시즌에 리그 18경기 12 득점을 기록했는데, 해당 시즌 팀 내 최다 득점자이자 팀 동료였던 팻 피너한보다 3골 정도 적었다. 메레디스가 광산 노동직을 1895년 1월까지 겸했으며, 피너한보다 12경기를 덜 뛰었음을 고려한다면 실로 놀라운 활약이었고, 그 덕 1895년 3월 16일에 웨일스 국가대표 데뷔까지 해냈다.

 
다음 시즌 메레디스는 33경기에 출전해 13 득점을 올렸다. 지난 시즌의 0.5배를 더 뛰었음에도 득점기록이 지난 시즌과 비슷하긴 했으나, 팀 내 최다 득점자였으며 뛰어난 경기력으로 팀을 테스트매치(승격 플레이오프로 이끌면서) 두 시즌만에 맨체스터 시티의 주장이 된다. 당시 그의 나이 21였다.

 
1896-97 시즌에 팻 피너한이 리버풀로 떠나면서 메레디스는 1897-98 시즌부터 인사이드 라이트의 스톡포드 스미스와 센터 포워드의 빌리 길레스피와 본격적인 파트너를 맺으며 좋은 궁합을 보였다. 특히 메레디스와 길레스피의 궁합이 위력적이었는데, 메레디스는 우측면에서 날카로운 크로스를 제공하고, 길레스피가 이를 득점으로 매듭지어내는 식의 득점루트를 통해 길레스피는 시즌 통산 19 득점을 올리며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될 수 있었다. 또한 메레디스와 길레스피는 함께 낚시 여행을 떠날 정도로 사적으로도 좋은 파트너가 되었다.

빌리 길레스피

 
메레디스는 스미스와 시즌 통산 12 득점을 기록하며 해당시즌 팀 내 득점 공동 2위에 위치했다. 특히 메레디스는 이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버튼 스위프츠를 상대로 생애 첫 헤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1898-99 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메레디스가 존경하는 선수 중 하나인 베테랑 인사이드 포워드, 지미 로스를 영입했다.

지미 로스

메레디스는 해당 시즌 4팀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시즌 통산 34경기 30 득점을 쌓았고, 팀을 1부 리그 다이렉트 승격(2부 리그 1위)으로 이끈다.

 
1899-90 시즌 원정 개막전, 패배하긴 했으나, 블랙번을 상대로 시즌 첫 득점을 터뜨렸고, 메레디스는 첫 1부 리그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일주일 뒤의 더비 카운티전에선 최고의 경기력을 보였고, 멀티골로 팀의 4-0 대승을 이끌어냈다.


4.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메레디스의 위력을 경험한 팀들은 이다음 시즌부터 거친 플레이를 통해 메레디스의 플레이 봉쇄하려 했고, 결국 메레디스는 1900-01, 1901-02 시즌에 두 자릿수 득점만을 기록했다. 메레디스의 플레이가 제압당하니, 맨체스터 시티의 순위는 떨어졌고, 결국 승격 3 시즌만에 2부 리그로 강등당한다.  비서관이었던 샘 오머로드는 사임했고, 후임으로 토마스 에드워드 말리가 맨체스터 시티의 지휘봉을 잡게 된다.

토마스 에드워드 말리

1902-03 시즌에 곧바로 팀을 2부 리그 1위로 이끌며 1부 리그로 복귀시킨 말리는 스코틀랜드인으로 스코틀랜드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며 효율적인 패스 플레이를 지향했다. 그 영향으로 메레디스의 자유롭게 움직이며 필드를 장악하려는 성향과 대립한 감독이었으나 동시에 메레디스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고뇌하는 감독이었다. 그는 이타적인 성향의 인사이드 라이트, 지미 배니스터와 하프백으로 새미 프로스트를 영입하며 적극적으로 메레디스에게 공을 공급할 수 있도록 했으며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프랭크 부스를 영입하며 수비의 집중을 메레디스로부터 분산시켜 메레디스에게 더 많은 공간이 주어지도록 했다.

 
메레디스는 1903-04 시즌에 인사이드 포워드인 조지 리빙스턴과 좋은 시너지를 만들어내며 팀을 리그 준우승, FA컵 우승으로 이끌었다. FA컵 준결승에서 셰필드 웬즈데이를 상대로 1 득점 2 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3-1 승리를 견인하고 결승에선 자신을 영입할 뻔한 볼턴을 상대로 리빙스턴의 어시스트를 받아 결승골을 터뜨렸고(볼턴 팬들은 당시 득점이 오프사이드 상황에서 나온 득점이라고 주장했다.) 아서 발포어 총리에게서 트로피를 수여받은 트로피를 맨체스터 시티에게 선물했다.


5. "맨체스터 시티는 불법 지불이 일상이다."


1904-1905 시즌엔 맨체스터 시티가 막판까지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우승경쟁을 했는데, 아스톤 빌라와의 경기에서 3-2 패배하며 우승을 놓치게 된다. 그런데 맨체스터 시티의 샌디 턴볼과 아스톤 빌라의 주장, 알렉스 리크가 경기종료 후 싸움을 벌였고 이 일을 계기로 축구협회는 이 사건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뒤에 메레디스가 아스톤 빌라의 리크에게 맨시티의 우승을 위해 뇌물 제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왔고 이 때문에 메레디스는 18개월 동안 출전이 금지된다. (그러나 메레디스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단 하나도 공개되지 않았으며, 메레디스 또한 계속해서 이 혐의를 부정한다.)
 
맨체스터 시티는 축구협회의 징계가 두려웠기에 메레디스의 징계 기간 동안 주급을 지불하지 않았고 메레디스는 구단의 행보에 실망하며 말리 감독의 명령에 따라 자신은 리크에게 뇌물을 지급을 시도하기만 했으며, 하이드 로드(당시 맨체스터 시티의 홈구장)에선 불법 지불이 일상이다.라고 주장했다.
 
메레디스의 주장을 단서 삼아 축구협회는 맨체스터 시티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선수들의 임금 지불 관련 불법 행위를 밝혀낸다. 당시 축구협회는 선수의 최대임금을 4파운드로 정해놨었는데 맨체스터 시티는 협회 몰래 보너스를 얹어주는 형식으로 6~7파운드 정도의 임금을 선수에게 지불하고 있었던 것이다. 맨체스터 시티는 즉시 £250 벌금과 하이드 로드를 한 달 사용금지 처벌을 받아야 했으며, 메레디스를 비롯한 주요 선수들은 1907년 1월까지 경기 출전이 금지됐다.
 
이로 인해 맨시티와 메레디스의 관계는 심하게 곪아버렸다. 결국 1906년 5월에 맨시티는 메레디스를 이적시장에 내놓았고, 같은 연고지의 라이벌 구단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벌금 £100와 사인온 수수료로 £500를 지불하며 메레디스를 영입한다.


6.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빌리 메레디스는 징계로 인해 1907년 1월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로서 데뷔할 수 있었으며 샌디 턴불, 찰리 로버츠, 딕 덕워스, 알렉스 벨, 하버트, 부르게스 그리고 맨시티시절 동료였던 지미 배니스터, 샌디 턴불 등과 함께 어니스트 날 감독 밑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기 시작한다.
 
메레디스가 드디어 풀시즌을 뛸 수 있었던 이다음 시즌, 맨유의 공격진은 풋볼리그를 지배했다. 특히 샌디 턴불 - 메레디스 듀오가 파괴적인 활약을 보였고, 팀은 1907년 9월 중순부터 11월 사이에 10연승을 기록하는 등 좋은 행보를 보였다. 결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리그 2위 아스톤 빌라와 승점 9점 차로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의 풋볼리그는 승리 시 승점이 2점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정말 압도적인 우승이었으며 구단 역사상 최초의 1부 리그 우승이었다.

 
또한 이 시즌 도중에 메레디스는 선수연맹을 창설하는데, 어린 시절 광산에서 일하며 임금의 25%가 삭감되었던 경험에서 비롯해 선수의 이적과 임금에 대한 제한을 완화하고자 하는 목표를 두고 활동하게 된다.
 
1908-09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리그에서 1909년 1월을 제외한 기간 동안 단 2승 만을 거두며 리그 13위를 기록한다. 리그에서의 실망스러운 성적에도 맨유는 1908 초대 채리티 실드(커뮤니티 실드의 전신)를 우승했으며 메레디스는 FA컵에서 브라이튼의 선수를 발로 차 1달 출전 금지라는 징계를 먹긴 했으나, 구단 역사상 최초의 FA컵 우승에 기여했기에 팬들을 원성을 사진 않았다.

시간이 흘러 1910년 2월 올드 트래포드가 개장했고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첫 풀시즌이었던 1910-11 시즌, 인사이드 라이트 해럴드 홀스가 메레디스와 합을 맞춰보았으나, 메레디스의 능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엔 홀스가 너무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였고, 결국 홀스는 잭 피켄으로 대체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이 시즌에 마지막 라운드까지 아스톤 빌라와 승점 1점 뒤처진 상태로 리그 우승을 경쟁했는데, 마지막 라운드에서 자신들이 선덜랜드를 이기고 아스톤 빌라가 리버풀을 상대로 승리하지 못해야 우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맨유는 선덜랜드에게 선제골을 내줬으나 메레디스의 크로스를 에녹 웨스트가 마무리하며 만들어낸 동점골을 시작으로 4골을 더 넣으며 승리를 거뒀다. 경기 종료 후 아스톤 빌라가 리버풀에게 1-3으로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맨유는 극적인 우승에 성공한다.
 
1911-1912 시즌, 맨유는 다시 한번 FA컵 우승을 이뤄냈지만 시즌 종료 후 어니스트 망날이 맨유를 떠나 맨시티로 둥지를 옮긴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고, 그 후임으로 부임한 존 벤틀리는 첫 시즌에 맨유를 리그 4위로 이끈다.

1911-12 FA컵 우승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7. 또 터진 승부조작 스캔들


그런데 시간이 지나 1914-15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승부조작 스캔들이 터진다. 리그 하위권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중위권이었던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했는데 해당 경기 내용이 비상식적이었고, 경기 전에 양 팀 선수들이 술집에서 함께 있는 모습을 봤다는 증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맨유에서 뛰다가 리버풀로 이적한 재키 셸든이 주도한 이 사건은 세 명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과 네 명의 리버풀 선수들이 가담했으며, 이들은 모두 축구계에서 영구퇴출되었다.(샌디 턴볼, 아더 웰리, 에녹 웨스트가 맨유 소속 가담자라 밝혀졌으나, 웨스트의 경우는 계속해서 혐의를 부인했고 1945년에 특별히 사면된다.)

에녹 웨스트

 
이번 사건에 메레디스는 연루되지 않았으며, 메레디스는 동료들이 경기 도중에 자신에게 패스하는 것을 거부한 이유를 알게 되자 놀랐다고 한다.


8. 맨체스터 시티로 복귀


1차 세계대전 도중엔 메레디스는 단 한 경기만을 뛰게 된다. 종전 이후엔 1921년 5월 7일 더비 카운티전에 출전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대 최고령 선수 기록(46세 281일)을 세웠으며 시즌 종료 후에 맨체스터 시티로 자유이적했다.
 
어니스트 망날 감독과 재회한 메레디스는 첫 시즌엔 25경기를 소화해 내며 클래스를 보였으나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전만 한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며 서브 자원으로 밀려났다. 1923-24 시즌, 맨체스터 시티 최고령 선수 기록(49세 245일)을 세우고 은퇴하게 된다.


빌리 메레디스는 축구사 최초의 슈퍼스타를 논할 때에 빠질 수 없는 선수 중 하나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의 베네핏 매치에서 근 40,000명의 관중을 모을 정도로 스타성이 뛰어났다. 낮은 무게중심과 민첩하고 섬세한 드리블과 통렬한 킥력을 갖추고 있음과 동시에 공간에 대한 이해도 또한 좋았다.

다양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상대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이들에게 많은 선택지를 제공해 주는 선수였다.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이쑤시개를 물며 경기에 임하기도 했다.
 
메레디스가 알려진 바로 통산 800에 육박하는 경기들을 소화해 내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의 최고령 선수가 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평생 술을 입에 대지 않은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메레디스를 포함한 그의 가족이 원시 감리 교인이었기에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