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트발 잡담

[부트발 잡담] 크라이프 드림팀의 붕괴, 천재들이 게을렀기 때문일까?

파울리노 하나 2023. 3. 26. 23:26

1. 구세주 요한


1980년대 후반의 바르셀로나는 경기력적으로 최악이었고, 재정적으로도 부채를 지니고 있었으며, 정치적인 부분에서도 문제를 겪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인 1988년 5월, 요한 크라이프는 감독으로 바르셀로나의 땅을 밟았다. 직책은 달랐지만 15년 전과 같이 크라이프는 구원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부임 첫 해부터 기존 선수 대부분을 방출시키고 13명의 선수를 새로이 영입했으며, 유소년 팀과 1군 팀의 축구철학을 일치시키는 등의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일반적으로 감독과 구단 사이에서의 마찰로 인해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었겠지만 크라이프에겐 용납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바르셀로나의 회장이었던 호세 루이스 누녜스는 1978년에 바르셀로나 회장으로 부임했는데 그 해는 크라이프가 축구선수 은퇴를 한 해였다. 즉, 누녜스는 크라이프가 선수시절 축구계와 바르셀로나에 끼친 영향력과 감독으로서 아약스에서 보여준 모습을 바탕으로 크라이프의 가능성을 비추어 볼 수 있었기에 크라이프에게 많은 자유도를 부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라 리가 용병제(비 스페인 국적 선수 최대 3인)로 인해 크라이프가 첫 해에 영입한 선수들은 호세 마리 바케로, 치키 베히리스타인,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훌리오 살리나스 등의 스페인 국적의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활용한 크라이프는 첫 시즌인 1988-89 시즌부터 라 리가 2위와 유러피언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끌어냈다.

후에 주장직까지도 맡게될 호세 마리 바케로

팀 내 최다 득점을 기록한 살리나스를 비롯해 영입된 이들의 실력은 출중했다. 그러나 그들은 크라이프의 축구철학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해줄 세계적인 기량의 '스타'와는 거리가 있었다.

훌리오 살리나스

이듬해의 두 영입을 시작으로 크라이프는 자신의 축구에 필수불가결한 '스타'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 일환이  돌연변이 수비수 로날드 쿠만과 데니쉬 디나마이트의 에이스, 미카엘 라우드럽의 영입이었다.쿠만은 선수시절부터 크라이프가 강조하던 후방자원의 하프라인 공략과 볼플레잉 능력을 갖춘 선수였으며, 라우드럽은 공격진에 공간과 창의성을 안겨줄 수 있는 천재적인 선수였다.

로날드 쿠만, 요한 크라이프, 미카엘 라우드럽

2. 의도적 갈등


크라이프 전술의 바탕이 되는 철학이 쿠만과 라우드럽이란 스타로 드러났다면 크라이프가 스타를 대하는 방식은 다음 해에 영입된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라는 또다른 스타로 드러난다.

바르셀로나의 외국인들 (미카엘 라우드럽,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로날드 쿠만)

스토이치코프는 바르셀로나에 오기 전 선수생활 영구정지 위기에 처한 이력이 있을 정도로 즉흥적인 성향이 강한 선수였으며 바르셀로나에 온 후에도 자신의 첫 엘 클라시코에서 주심의 발을 밟으며 10주 출전 금지 처분을 받는 등의 돌발 행동을 보였으나 크라이프는 그런 그의 성향을 관대하게 받아들였고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크라이프가 스타를 대하는 방식은 관대하면서도 관대하지 않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크라이프는 토론을 즐기는 네덜란드의 문화와 자신의 스승인 리누스 미헐스의 라커룸 통솔 방식에 영향을 받아 의도적으로 선수들을 자극하고 여러 갈등을 빚어내는 등 선수를 극한으로 몰아내며 더 좋은 플레이를 생산해내려 했다.

리누스 미헐스와 요한 크라이프

후에 인터뷰에서 스토이치코프가 선수시절 크라이프와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크라이프는 다른 팀원들 앞에선 나를 죽였고, 개인적으로는 내가 최고라고 말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내가 재앙이다, 다음 경기에 출전하지 않겠다, 나를 팔겠다라 말하지만 훈련 후엔 식사를 요청하는 사이"라 말했다. 스토이치코프는 즉흥적이면서도 뒤끝없는 성격으로 크라이프와의 의도적 갈등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선수였다.


3. 갈등속에 무너진 꿈


크라이프는 라우드럽을 향해서도 "함께 일하기 가장 어려운 선수", "항상 최선을 다하지 않는 선수", "리더십이 부족한 선수"라는 등의 부정적인 기사를 생산해 냈으나, 라우드럽은 스토이치코프와 달랐다. 라우드럽은 크라이프의 의도된 갈등을 거북하게 받아들였고 이것은 갈등의 영역을 넘어선 불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불화는 호마리우 영입 이후 라우드럽이 벤치에서 조차 밀려나게 되며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특히 1993-94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라우드럽을 명단에서 제외시켜 버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결국 라우드럽은  라이벌 구단인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 버렸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크라이프의 선수단 지도 방식이 그를 라이벌 구단으로 내쫓아버린 꼴이 되어버렸다.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라우드럽과 경합중인 주젭 과르디올라

설상가상으로 호마리우 영입의 여파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호마리우는 계속해서 방탕하고 게으르며 문란한 생활을 추구했는데, 1994년 월드컵 종료 후에는 약속한 시간의 한 달 뒤에야 바르셀로나로 복귀하는 모습을 보였고 호마리우의 태도에 화가 단단히 난 팀의 베테랑들은 팀 미팅을 가졌다. 그러나 호마리우는 선수들의 말을 듣고 광분해선 팀원들의 월드컵 성적을 들먹이며 엿이나 먹으라며 고함을 질렀다.
 
라우드럽의 이탈 이후 큰 기대를 걸며 또다른 스타인 게오르게 하지를 영입하며 1994 월드컵 올스타 멤버 중 셋(호마리우, 스토이치코프, 하지)를 보유하게 된 바르셀로나였지만 드림팀의 끝은 다가오고 있었다.

 
높은 자유도를 부여받은 하지는 부상으로 인해 라우드럽을 완벽히 대체해내진 못했으며, 호마리우는 계속해서 방탕했고 스토이치코프조차 크라이프와의 갈등에 지친 기색을 내비쳤고 1995년, 호마리우와 스토이치코프는 바르셀로나를 떠난다.
그렇게 드림팀은 붕괴되었고 크라이프는 자신의 철학을 다시 재현해 내기 위해 유스 콜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보았지만 자신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줬던 누녜스 회장과의 불화로 경질된다.


4. 마치며


결국 라우드럽을 비롯한 이들은 그저 언쟁을 즐길 줄 아는 네덜란드인이 아니었을 뿐인데 '게으른 천재'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설령 네덜란드 토론(언쟁) 문화를 깊게 이해하고 있는 이라도 크라이프의 지도 방식에서 오랜 기간 살아남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갈등 속에서 구현된 크라이프의 '꿈'은 갈등속에서 무너져 내렸다는 것이다. 크라이프의 꿈, '드림팀'이라는 사례는 우리의 삶의 시작과 끝에는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으며, 우리는 갈등 속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얻어갈 수 있지만 그것엔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성도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