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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 아르투르 안투네스 코임브라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포워드
국적: 브라질
출생일: 1953년 3월 3일
클럽 경력:
1971 - 1983 플라멩구
1983 - 1985 우디네세
1985 - 1989 플라멩구
1991 - 1994 가시마 앤틀러스
통산 경기: 약 886경기 (브라질 국가대표 팀 약 76경기)
1. 작은 아르투르
1953년 3월 4일,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의 포르투갈인으로 구성된 중산층 가정에서 아르투르 안투네스 코임브라가 태어난다. 지쿠의 아버지는 전직 골키퍼로 축구 클럽 '가베아'의 창단 멤버이자 플라멩구의 열정적인 팬이었다.
어느 날 지쿠의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브라질과 플라멩구의 유니폼을 선물했는데 막내였던 지쿠에게 남은 유니폼은 8번 유니폼 밖에 없었다는 일화를 들여보아, 축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아버지였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지쿠는 형제들과 함께 일찍이 프로 축구 선수가 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지쿠'라는 별명은 사촌이 지어준 것으로 '작은 아르투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Arturzinho, Arturzico, Tuzico, Zico 순으로 별명이 변화했다.
학교 수업은 패스하고 주벤투지 청소년 팀에서 볼을 차며 축구에 전념했는데, 지쿠가 보여준 축구에 대한 열정이 또래의 아이들과는 남다른 수준이었기에 이웃들에게 유명해지기도 했으며 후에는 리버 풋볼 클럽이라는 풋살 클럽에 입단했다.
14살엔 형이자 아메리카 RJ의 축구선수였던 에두 안투네스가 구단에 권유함으로 인해 아메리카 RJ의 입단 테스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테스트 며칠 전에 라디오 기자인 '셀소 가르시아'가 지쿠가 10 득점을 해내는 리버 풋볼 클럽의 풋살 경기를 보고 충격을 받았고 아버지와 지쿠 본인에게 플라멩구 입단을 설득했다. 플라멩구의 열정적인 팬이었던 부자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결국 1967년 9월 28일에 플라멩구 청소년 팀에 입단하게 된다.
2. 역경
1971년, 18살의 나이로 1군 데뷔를 했고 그 경기에서 결승골 어시스트까지 해내며 입지를 늘렸으며 해당 시즌에 플라멩구가 캄페오나투 카리오카를 우승하며 지쿠도 프로 첫 우승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듬해에 체격이 왜소하단 이유로 다시 청소년 팀으로 내려갔다.
청소년 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 지쿠는 1972 올림픽 남미 예선에서 브라질 대표팀에 데뷔했고 올림픽 예선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정작 올림픽 본선 대표팀 명단에 들지 못했고 플라멩구에서 청소년 팀으로 강등된 것과 이어져 일어난 일이었기에 너무나도 큰 좌절감을 느꼈고, 아버지와 축구선수 진로를 포기하는 것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10일간 플라멩구 훈련에 불참하는 등 정도로 잠시 어두운 때를 보냈다.
그러나 형제들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견뎌냈고 신체적으로 성장한 후인 1974년에 등번호 10번을 배정받으며 플라멩구 1군으로서 자리 잡는다.
주전으로 자리 잡은 시즌부터 득점과 경기조율, 기회 창출, 세트피스 득점력 등 다방면에서 남다른 퍼포먼스를 보여줬고 카리오카 우승을 이끌며 대회 최우수 선수 선정의 뛰어난 활약을 보였고 이듬해인 1975년 카리오카 득점왕과 브라질레이루 올스타 선정, 1976에는 더 많은 득점을 기록하며 브라질 시즌 득점왕이 되었으며,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대회 올스타에도 선정되었다.
브라질 무대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은 지쿠는 1976년 리오 브랑코 컵 결승에서 시니어 국가대표 데뷔까지 해내지만 8월에 절친이자 브라질의 촉망받는 재능인 제랄도 아소비아도르가 편도선염수술 중 마취제로 인한 알레르기 작용으로 세상을 떠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져 온전히 행복한 한 해가 되진 못했다.
3. 하얀 펠레
갖가지 난관이 있었지만 지쿠는 무너지지 않았다. 1976년에는 브라질 시즌 득점왕과 남미 올해의 축구선수 실버볼을 수상 받았으며 1977년에도 카리오카 득점왕, 브라질 시즌 득점왕을 기록했고 브라질레이루 리그 올스타, 남미 올해의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다.
좋은 분위기에서 맞이한 1978년 월드컵은 지쿠의 국가대표 커리어 중 브라질이 최고 성적을 거둔 월드컵이었다. 개막전 16강 조별리그에서 스웨덴을 상대로 1-1인 상황에서 버저비터 헤더 득점을 기록했으나, 주심이 공이 공중에 떠있는 순간에 이미 휘슬을 불었다며 골을 취소했고, 브라질은 조 2위를 기록하며 8강에 진출했고 8강 조별리그에서 페루를 상대로도 득점하며 브라질을 동메달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 대회가 지쿠 전성기의 시작을 알리는 대회였다. 1978년, 또 카리오카 득점왕을 기록하며 플라멩구를 카리오카 우승으로 이끌었고 친선 대회인 라몬 데 카란사에서 요한 네스켄스의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득점을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인 1979년은 지쿠의 커리어 중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한 시즌으로 플라멩구를 카리오카와 카리오카 스페셜 챔피언십의 우승으로 이끌었고 이 과정에서 카리오카 득점왕과 브라질 시즌 득점왕을 달성하며 26살에 디다를 제치고 플라멩구 역대 최다 득점자 타이틀을 획득한다.
1979 코파 아메리카에선 3위를 기록했다. 이러한 업적을 달성한 지쿠는 해당 연도 FIFA 월드 XI로 선정되어 아르헨티나와 경기를 치루기도 했다.
1980년에는 브라질레이루 득점왕, 브라질 시즌 득점왕과 남미 올해의 축구선수 실버볼에 빛나는 활약상으로 플라멩구를 브라질레이루 결승으로 이끌었다. 아틀레치쿠 미네이루를 상대하는 결승 1차전에선 부상으로 결장해 플라멩구는 1-0으로 패배했으나, 2차전에서 지쿠의 복귀에 힘입은 플라멩구는 홈에서 3-2로 승리하며 합산스코어를 동점으로 만들었고 준결승 전적으로 구단 첫 브라질레이루 우승을 달성했다. 게린 스포르티보가 선정한 올스타에 포함되기도 했다.
1981년엔 카리오카 우승과 대회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선 결승 1,2차전의 4 득점을 포함해 11 득점을 하며 대회 득점왕이자 최우수 선수가 되었고 플라멩구에게 구단 역사상 첫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선물한다. 이어지는 인터컨티넨탈 컵에서도 '붉은 제국' 리버풀을 3-0으로 대파하며 경기 MVP로 선정되었고 지쿠의 뛰어난 클러치 능력을 포함한 퍼포먼스는 남미 올해의 축구선수와 게린 스포르티보 선정 올해의 축구선수로 인정받는다.
1982년엔 브라질레이루 우승과 카리오카 득점왕, 브라질레이루 득점왕, 브라질 시즌 득점왕을 달성했다. 또한 이는 지쿠가 득점왕을 달성한 마지막 시즌이었다. 1982 월드컵에선 소크라치스, 호베르투 팔캉, 토니뉴 세레주와 함께 황금 4중주라 불리는 공격적인 중원에 구성되어 활약했고 브라질은 12강 조별리그에서 파울로 로시에게 해트트릭을 헌납하며 탈락했지만 지쿠는 월드컵 브론즈볼과 남미 올해의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다.
4. 우디네의 명예시민
남미 무대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이룬 30살의 지쿠는 플라멩구의 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도전을 원했고 AC 밀란과 AS 로마에게 이적 제의를 받으며 세리에로의 진출이 거의 확정적인 분위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우디네세가 400만 달러의 제의를 보내며 이적사가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액수가 너무나 컸기에 이탈리아 축구연맹은 이적을 반대했고 이는 우디네세의 팬들은 모금활동을 발생시키며 나아가, 프리울리 지역의 오스트리아 합병 시위를 촉발시키는 행동이 되었다. 프리울리의 시민들은 "지쿠나 오스트리아"라는 구호를 외쳤으며 더 이상 일개 스포츠적 문제가 아닌 국가적 문제가 되어버린 지쿠의 이적 사가는 산드로 페르티니 이탈리아 대통령이 나서서 이적을 중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디네세에서의 첫 시즌은 리그 19 득점을 기록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나, 전체적인 스쿼드 밸런스가 좋지 못했던 우디네세는 지쿠가 있을 때와 부상으로 이탈했을 때의 경기력의 차이가 매우 심했다. 30대에 접어든 지쿠에겐 부상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으니 성적은 들쑥날쑥했다. 그러나 나올 때마다 좋은 활약을 보인 지쿠는 우디네세에서 1983 게린 스포르티보 선정 올스타와 월드 사커 선정 1983 올해의 축구선수, 1984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등의 업적을 달성했다.
1985년, 지쿠는 이탈리아에서의 광고 계약 문제로 인해 불법 화폐 수출 문제와 연루되었고 이는 지쿠가 이탈리아를 떠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 법원이 1심에서 징역 8개월 + 벌금형을 선고했으나, 지쿠는 이를 항소했고 4년 뒤에 지쿠의 무죄로 판결 나지만 지쿠는 이탈리아를 떠난 지 오래였다.
지쿠의 존재는 우디네시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미쳤고 2009년엔 우디네 명예시민이 되었다.
5. 플라멩구 복귀, 첫 은퇴
1985년에 플라멩구로 복귀한 지쿠는 복귀 한 달 만에 방구와의 경기에서 마르시우 누네스의 태클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1986 월드컵 참가가 불가할 것이라는 여론이 지배적인 상황, 그러나 지쿠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에 8시간을 재활운동에 투자하며 어떻게든 월드컵 참가를 하려 노력했으며 결국 1986 월드컵에 참가해 낸다. 그러나 완벽한 부상 회복이라 보긴 어려웠기에 교체자원으로 활용되었으며 8강전, 프랑스와 1-1로 비기고 있는 상황에서 극적인 PK를 얻어내지만 이를 실축하며 브라질의 승부차기 끝의 탈락을 이끌어낸 장본인이 되어버렸다.
1986년엔 부상의 여파로 지쿠가 영향력을 보였다곤 보기 어려우나 플라멩구는 카리오카 우승을 차지했으며
지쿠는 1987년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폼을 되찾고 활약하기 시작한다. 나이가 나이었던 만큼 30대 이전 정도의 출전 시간을 부여받진 못했지만 코파 유니앙 우승을 달성한다.
이후 1989년에 축구선수를 은퇴한 후 브라질의 스포츠 장관직을 맡았지만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다시 선수로 복귀해 일본으로 날아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다.
6. サッカーの神様 (축구의 신)
일본의 스미토모 금속공업과 두 시즌 계약을 맺은 지쿠는 300만 달러의 연봉을 받았는데, 당시 2부 리그 소속인 구단이 지불하기에는 매우 큰 금액이었지만 축구에 대한 전국민적인 관심 상승을 위해 기꺼이 지불했다.
첫 시즌부터 2부 리그 득점왕을 해내며 스미토모를 2부리그 준우승으로 이끌었고, 가시마 앤틀러스로 구단명을 바꾼 스미토모 금속공업은 J리그 창립 멤버가 될 수 있었다.
일본의 문화와 매우 잘 맞았던 지쿠는 가시마의 주장으로 활동하며 레오나르두나 알신도 사르토리와 같은 플라멩구 출신의 선수들이 가시마로 이적하도록 설득하기도 했으며 가시마를 1993 J리그 전기 우승으로 이끈다.
이후 부상으로 인한 결장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은퇴수순을 밟았고 1994년 8월에 은퇴한다.
지쿠와 게리 리네커로 대표되는 90년대 초 J리그의 스타들은 일본의 축구에 대한 관심도를 상승시키는 데에 크게 공헌했다. 지쿠는 일본 축구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일본의 팬들로부터 축구의 신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가시마 축구 경기장엔 지쿠의 동상이 세워져있기도 하다.
지쿠는 축구 역사에서 손꼽히는 재능으로, 역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역대 최고의 드리블러, 역대 최고의 프리키커를 논할 때 항상 거론되는 선수들 중 하나이다.
리더십이 뛰어났으며 10번 공격형 미드필더의 정석과도 같은 선수였지만 뛰어난 축구지능을 앞세워 중앙 미드필더와 포워드에서도 활약할 수 있었다. 통산득점이 약 580 득점 이상일 정도로 득점에 있어서, 특히 프리킥에 있어서 남다른 감각을 지니고 있었으며, 양발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정확성과 창의성을 모두 갖춘 완벽에 가까운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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