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네임: 히데구티 난도르
포지션: 센터 포워드
국적: 헝가리
출생일: 1922년 3월 3일
클럽 경력:
1942-1945년 엘렉트로모스
1945-1958년 MTK 부다페스트
통산 경기: 약 436경기 (헝가리 국가대표 팀 약 69 경기)
1. 페르난디트 칼텐브루너
1922년 3월 3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군인인 아버지와 공장노동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의 아버지는 헝가리로 이주한 바나트 슈바벤인이었기에 본래 이름은 페르난디트 칼텐브루너였으나, 이후 헝가리 정부의 압력으로 인해 '차가운 우물'이란 뜻의 헝가리식 이름인 히데구티 난도르로 개명된다.
네 명의 형제자매들과는 다르게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를 좋아하던 히데구티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해 마을 공터에서 자주 공을 찼고 또래에 비해 키가 컸던 10대에는 골키퍼까지도 맡았다. 12살에 지역 축구팀인 우즐라키 FC의 청소년 팀에 입단하면서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으며, 2차 세계대전 도중이었던 1942년에 엘렉트로모스에 입단하며 시니어 커리어를 시작한다.
2. MTK 전성기를 이끌다
군에 징집된 형제가 동부전선에서 세상을 떠나는 등의 일이 있었으나 엘렉트모스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 히데구티는 1945년 헝가리 국가대표 데뷔, 1947년에 MTK 부다페스트로 이적한다.
부다페스트는 헝가리 인민 공화국이 세워지고 국가 보호 당국에 인수되어 여러 차례 구단명이 바뀌는 등의 혼란스러울 때였으나 히데구티는 그곳에서 폴스나인의 영역을 개척해 내며 산도르 카로이, 코바치 임레, 란토스 미하이, 자카리아스 요제프 등의 동료들과 함께 구단의 전성기를 이끌며 1951, 1952, 1958 시즌 리그 우승과 1952 헝가리 컵과 1955 미트로파 컵 우승을 차지했으며 1955 초대 유러피언 컵에도 참가에 공헌했다.
3. Öreg
30대에 접어들고 헝가리 국가대표팀에서의 비중도 매우 늘어났는데, 히데구티가 상대 수비를 끌고 내려 오면 발생하는 공간으로 인사이드 포워드(현재의 공격형 미드필더 내지 처진 공격수)인 푸슈카시 페렌츠와 산도르 코치시를 비롯한 선수들이 침투를 가져가며 MM의 대형을 이루는, 1950년대 초중반 매직마자르 전술의 핵심으로서 활약했다.
이 시스템 속에서 히데구티는 50여 년간 홈 패배가 없던 잉글랜드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6-3 승리를 가져오거나
약 6개월 뒤에 치러진 친선전에서도 7-1 승리에 공헌하는 파과적인 모습을 보였다.
1952 올림픽 우승, 1953 중유럽 인터내셔널 컵 우승과 헝가리 올해의 축구선수 선정, 1954 월드컵 준우승과 대회 올스타 선정 등의 업적을 달성했다. 1958년 월드컵에도 참가했으나 당시 히데구티의 나이는 36이었으며 헝가리 혁명으로 인해 매직 마자르의 중심들이 헝가리를 떠나 흩어지며 전력이 약화되었고, 조별리그에서 스웨덴과 웨일스에 밀려 탈락한다. 이후 히데구티는 클럽과 국가대표와 축구선수 은퇴했고 '골든 팀'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선수로 남았다.
히데구티 난도르는 탁월한 축구 지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폴스나인이었지만 통산 득점이 약 300 득점 부근에 있을 정도로 득점력 또한 겸비한 포워드였다.
MTK 부다페스트는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홈구장을 '난도르 히데구티 슈타디온'이라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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