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타 데 호이

[풋볼리스타 데 호이] 3월 11일 예예 마드리드의 정신적 지주, 피리

파울리노 하나 2023. 3. 12. 00:01


풀네임: 호세 마르티네즈 산체스

포지션: 미드필더, 포워드
국적: 스페인
출생일: 1945년 3월 11일

클럽 경력:
1963 - 1964 그라나다

1964 - 1980 레알 마드리드

1980 - 1982 푸에블라

통산 경기: 약 639경기 (브라질 국가대표 팀 약 41경기)



1. 시작


1945년 3월 11일, 스페인 세우타에서 호세 마르티네스 산체스가 태어난다. 임 페리오 데 리피엔 , 소시에다드 데포르티바 세우타 등에서 유소년 축구를 접했고 1960년에 15의 나이로 지역 축구 클럽 AD 세우타에 입단, 유소년 팀에서 성장했다.

 

1963년에 의학 공부를 위해 당시 그라나다로 이사하며 당시 스페인 2부 리그 그라나다 FC로 이적했고 프로 레벨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인 피리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두 도시의 두 클럽, 바르셀로나의 RCD 에스파뇰과 마드리드의 레알 마드리드 CF의 관심을 받게 된다.


2. 레알 마드리드


1964년, 피리는 2억 페세타의 이적료를 발생시키며 결국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고 엘 클라시코에서 푸슈카시 페렌츠와 교체되며 레알 마드리드 데뷔를 하게 된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저승사자 군단'의 다음 세대를 구상 중인 상황이었고 피리가 이적한 시즌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1966년엔 푸슈카시 페렌츠, 호세 산타마리아가 이탈했다. 이들의 줄어든 입지는 아만시오 아마로, 이그나시오 조코, 마누엘 산치스 등의 선수들로 대체되었고 피리는 이들과 함께 1964-65 라 리가 우승, 1965-66 유로피언컵 우승에 일조하며 페렌츠와 산타마리아의 유종의 미를 지켰다.

 

이 시즌에 1966 월드컵 개막전에서 스페인 국가대표 팀에 데뷔하기도 한다. 대회 성적은 16강 조별리그 3위였다.

 

1970-71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하진 못했지만 첼시를 상대로 쇄골이 부러진 채로 경기를 뛰었으며, 1974-75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선 고열 상태에서 경기 시작 10분에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지만 계속해서 바르셀로나를 상대하며 우승까지 이끌었다. 이러한 업적이 인정되어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으로부터 '라우레아다'를 수상 받았다.

금과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라우레아다

'예예 마드리드'는 오랜 기간 유러피언컵 우승을 해내지 못했으나, 피리의 공헌으로 1966-67 , 1967-68 , 1968-69 , 1971-72 , 1974-75 , 1975-76 , 1977-78 , 1978-79 , 1979-80 라리가 우승, 1969-70 , 1973-74 , 1974-75 , 1979-80 코파 델 레이 우승을 해내며 자국 최강의 팀임을 굳건히 해낼 수 있었다.

예예 마드리드 선수진


3. 레알 마드리드 이후


33의 나이로 1978 월드컵에도 참가했으나, 이번에도 16강 조별리그 3위를 기록했다. 1980년엔 16년을 헌신한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 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멕시코 리그의 푸에블라로 이적했지만 어려운 구단 재정상태로 인해 계약 기간을 1년 남기고 37의 나이에 은퇴했다.

 

이후 팀 닥터로서 레알 마드리드로 복귀하기도 한다.


피리는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포워드에 배치되기도 할 정도로 득점력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16 시즌 중 11 시즌 동안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할 정도로 꾸준하기도 했다.

 

특히 레알 마드리드를 위해 헌신하려는 성향이 매우 강했던 선수로, 그야말로 구단 위상에 걸맞은 정신을 갖춘 선수였다.

 

결승 전날 나는 고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의사들은 내가 경기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40도의 열병으로 깨어났지만 바르셀로나와의 결승전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경기 시작 10분 후 나는 쇄골이 부러지는 불운을 겪었다.
나는 열병과 쇄골이 부러진 상태로 전체 경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