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타 데 호이

[풋볼리스타 데 호이] 무랄랴, 자우마 산투스

파울리노 하나 2023. 2. 28. 06:23


풀네임: 자우마 페레이라 디아스 도스 산투스


포지션: 라이트백
국적: 브라질
출생일: 1929년 2월 27일

클럽 경력:
1948 - 1959 포르투갈어

1959 - 1968 팔메이라스

1969 - 1970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

통산 경기: 약 1062경기



1. 꿈을 버려야만 했던 아이


1929년 2월 27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자우마 산투스가 태어난다. 자우마의 아버지는 전투조종사였는데, 어린 시절의 자우마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비행기 조종사를 꿈꿨었다. 그러나 자우마의 집안은 비행 학교의 등록금을 부담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고 자우마는 비행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일찍이 제화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빠듯한 삶이었지만 주말에는 축구를 했다. 운동 겸 취미 생활이었던 축구를 등한시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자우마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른손의 치명적인 부상으로 인해 비행기 조종사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자우마는 냉철했다. 오랜 꿈이 좌절되었음에도 얼마 안 되어 '축구선수'라는 새로운 직업을 위해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기 시작한다. 센터백으로서 두각을 드러냈지만 가정을 부양해야 했기에 일을 내팽겨 칠 수는 없었고, 자우마는 약체였지만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준 포르투게사에 입단해 낮에는 훈련을, 밤에는 제화공 일을 하며 시니어 경력을 시작한다.


2. 축구로 날아오르다



하지만 포르투게사에서의 처음은 쉽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뛰어나다는 이유로 미드필더라는 맞지 않는 옷을 입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도 잠시, 브라질의 떠오르는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브란당지뉴가 입단한 뒤로는 우측 수비수로 출전하면서 기량을 뽐내기 시작한다.

타고난 체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공수양면에서 뛰어난 영향력을 보였고, 1952 파나메리칸 챔피언십에서 브라질 대표팀 데뷔, 우승까지도 해내며 니우통 산투스와 함께 당시 브라질에 자리 잡고 있던 수비수에 대한 고정관념에 금을 내기 시작했다.

 

포르투게사에서의 11 시즌 동안 줄리뉴 보테류, 핑가, 브란당지뉴 등의 걸출한 선수들과 함께 팀의 중심으로 활약하며 팀을 1952, 1955 토르네이오 리오-상파울루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클럽팀과 마찬가지로 대표팀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였는데, 1954 스위스 월드컵의 '베른의 전투'라 불리는 헝가리와의 8강전에서 4 - 2로 패배하며 자국을 '마라카낭의 비극'의 상처를 치유해내진 못했으나 페널티킥 득점을 기록하고 경기 내내 냉철함을 유지하며 대회 올스타 팀에 들어가는 활약을 보였다.

1957 로카 컵우승 후에 맞이한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선 니우통 데 소르디에게 주전을 내주었으나 브라질은 펠레, 가린샤, 마리우 자갈루 등 새롭게 대표팀에 합류한 선수들을 필두로 결승에 진출했고, 자우마는 결승에선 선발 출전해 좋은 활약을 보이며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며 다시 한번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된다.


3. Muralha


1959년, '월드컵 위너' 자우마는 브라질의 명문 구단인 SE 파우메이라스에 입단하게 된다. 입단 당시의 자우마의 나이는 30이었지만 놀라운 수준으로 기량을 유지했으며 포르투게사 시절 동료였던 줄리뉴와 자우마 디아스 그리고, 아데미르 다 기아로 대표되는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 1959 캄페오나토 파울리스타, 1960 타사 브라질 우승에 공헌한다.

 

국가대표에서의 활약도 여전했는데 1960, 1963 로카 컵 우승을 이끌었으며, 1962 칠레 월드컵에선 전경기에 출전하며 다시 한번 브라질을 세계 정상으로 이끌었다.

자우마 산투스, 지투, 펠레

특히 체코 슬로바키아를 상대한 결승전에선 쐐기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자우마가 78분경에 왼발 하프 발리로 높게 쏘아 올린 인스윙(In-swing) 크로스가 체코의 수비 뒷공간을 향했고 이를 처리하기 위해 체코의 골키퍼, 빌리암 슈로프가 공을 캐치하기 위해 도약했으나 햇빛으로 인해 잘못된 처리를 했고 이를 브라질의 스트라이커, 바바가 결정지으면서 승세를 굳히는 득점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활약으로 3번째 대회 올스타에 선정이 되었다.


1966 WC 결승, 브라질의 쐐기 득점


월드컵 이후의 기량도 세계적인 수준이었기에 월드 사커지 선정 1962, 1963, 1965 베스트 XI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자우마의 월드컵 여정은 좋게 마무리되진 못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주전 선수들의 혹사 문제와 펠레의 부상, 당시 나이가 37이었던 자우마 산투스가 국가대표로 뽑히고 카를레스 아우베르투가 뽑히지 않는 등의 문제가 겹쳐져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충격적인 성적을 거두게 되었다. 아이러니 한 점은 당시 감독이 자우마에게 첫 월드컵 우승을 안겨준 비센치 페올라 감독이었다는 것. 이후로 자우마는 국가대표 은퇴 수순을 밟았고 1968년, 국가대표에서 은퇴한다.

1966 WC 브라질 선수진

파우메이라스에서의 기량은 아직 유효했다. 1967 토르니오 로베르토 고메스 페드로사, 1967 타사 컵을 들어 올렸다. 그 후 파우메이라스 청소년팀 코치 생활을 짧게 한 후 1969년에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로 이적했다. 당시 그의 나이 40이었고 신체능력은 급격하게 꺾인 상태였지만 멘탈은 여전했다. 발 빠른 적을 상대할 때에는 준족의 레프트백인 훌리오 호세 페피첼리와 자리를 바꾸는 등 자신의 노련함을 바탕으로 팀을 위해 노력했고 1970 캄페오나투 파라나엔시 우승에 공헌하며 아틀레치쿠에서 은퇴한다.


자우마는 신체적 능력이 매우 뛰어났으며 이를 최대한 활용할 줄 아는 선수였다. 뛰어난 기술력을 가지고 있어서 적극적인 공격가담의 영양가 또한 뛰어났다. 프란츠 베켄바워와 필립 람과 함께 월드컵 베스트 XI에 3번 선정된 선수이다.

 

많은 경기를 뛰었지만 퇴장 한번 경험한 적이 없었으며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과 겸손을 지닌 선수였다.

 

나는 극히 평범하게 살아왔고
상대를 존중했으며
경기를 보러 온 관중을 존중했다.
피치에서 퇴장된 적이 없어 다행이다.

- 자우마 산투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