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트발 잡담

[부트발 잡담] 반 갈, 골키퍼, 실험정신

파울리노 하나 2022. 12. 4. 00:56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국가대표를 깜짝 데뷔하며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는 선수가 있다.

바로 네덜란드 대표팀의 '안드리스 노퍼르트'다.


94년생으로 다른 위치의 선수라면 전성기를 구가할 나이의 노퍼르트는 월드컵을 앞둔 상황에서의 A매치에서 단 한 차례도 기용된 적이 없으며 심지어 선수생활 대부분을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의 2부 리그에서, 그것도 주전이 아닌 채로 보낸 무명 선수였는데

이번에 주전으로 나설 것이라 생각되던 아약스의 렘코 파스베이르를 제치고 네덜란드의 주전 수문장으로 나서고 있다.

사실 루이 반 갈이 골키퍼 기용에 있어서 팬들을 놀라게 한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85년 아약스의 감독으로 부임한 요한 크루이프는
스탠리 멘조를 주전으로 기용하게 된다.

크라이프는 골키퍼 백패스 관련 규정이 생기기 전부터 골키퍼 또한 다른 포지션의 선수들처럼 공을 패스하고 소유할 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던 인물이었는데
스탠리 멘조는 그 기준에 부합하던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선수였다.

스탠리 멘조


멘조는 수리남 태생의 골키퍼로 흑인 특유의 신체능력을 활용에 있어서도 번뜩이는 모습을 보였지만 최대의 특징은 볼 플레잉 능력이 매우 탁월한 선수였다.
안정감 측면에서는 다소 떨어지는 선수였지만 크라이프에겐 이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볼 플레잉 골키퍼에 대한 크라이프의 관대함은 바르셀로나로 둥지를 옮긴 이후에도 안도니 수비사레타, 카를레스 부스케츠에게
더 나아가면 크루이프에게 큰 영향을 받은 과르디올라의 빅토르 발데스에게도 나타난다.

빅토르 발데스


반 갈 감독 또한 골키퍼에게 볼 플레잉 능력을 요구했으나 볼 플레잉 골키퍼의 실수에 대한 관대함은 크라이프와는 달랐다.

1991년엔 루이 반 갈이 아약스의 감독으로 부임하는데 당시만 해도 반 갈의 축구 지도자 경력은 수석코치 경력 약 5년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교사생활을 경험해본 반 갈은 빠르게 선수단을 휘어잡았고

유로피언컵(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에서 무패로 8강까지 진출한다. 8강 상대는 프랑스의 AJ 오세르였는데 지금은 프랑스 리그 1의 강등권에 있는 오세르이지만 당시만 해도 프랑스 리그에서 상-중상위권 정도의 팀이었다. 하지만 아약스만큼의 기세를 타고 있던 팀은 아니었으며 심지어 리그 5연패 도중이었다.

그러나 아약스는 1차전에서 오세르에게 4골이나 먹히며 2-4의 충격적인 패배를 맛보는데
특히 오세르의 전설적인 선수인 파스칼 바히루아가 찬 코너킥을 멘조가 잘못 처리해 오세르가 앞서 나가는 골을 허용하는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크라이프라면 그러려니 넘어갔을지도 모르겠지만 반 갈은 아니었다. 이 경기 이후로 멘조는 기용되지 않기 시작했으며 반 갈은 수석코치 시절 자신이 스카우트한 에드윈 반데사르를 끌어올려 기용하기 시작한다.

1991-92 시즌의 루이 반 갈은 멘조의 실수를 보고
2022-23 시즌의 루이 반 갈은 파스베이르,실러선 등의 실수를 보고 각각 반데사르와 노퍼르트를 기용하고 있다.

반 갈의 이러한 모습은 그의 철두철미하고 기계스러운 이미지에 대비된다.

팀으로서 돋보이는 것을 좋아하던 반 갈의 축구가 30년이 지난 지금엔 다소 실리적인 형태로 바뀌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지만

자신의 철학을 위해 얼마든지 실험할 수 있는 반 갈의 태도는 여전하지 않나 싶다.

아니, 어쩌면 반 갈에겐 실험조차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반 갈 입장에선 그저 더 안정적인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세트피스 전술을 선수들에게 맡기거나, 축구를 컴퓨터 수학과 연결하는 등의 반 갈의 모습은 보는 입장에서 새로운 자극과 함께 여러 생각할 거리를 제시해준다.

1992년에 반 갈의 축구를 대하는 태도가'에드윈 반데사르'로 드러났다면
2022년에는 '안드리스 노퍼르트'란 형태로 그 태도의 건재함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