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타 데 호이

[풋볼리스타 데 호이] 초대 월드컵 스타? 엑토르 스카로네

파울리노 하나 2022. 11. 27. 11:38



풀네임:
호세 엑토르 페드로 스카로네 베레타

포지션: 포워드

국적: 우루과이
출생일: 1898년 11월 27일

클럽 경력:
1917-1926 나시오날
1926-1926 바르셀로나
1926-1931
나시오날
1931-1932 인테르

1932-1934 팔레르모
1934-1936
나시오날

1937-1937 원더러스
1938-1939 나시오날

통산 경기: 약 321경기 (우루과이 국가대표 52경기)


1. 입단 테스트 탈락자가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1898년 11월 26일, 우루과이의 수도이자 최대의 항구 도시인 몬테비데오에서 엑토르 스카로네가 태어난다.
스카로네에겐 10살 터울의 형이 있었는데, 바로 나시오날의 전설적인 공격수인 카를로스 스카로네였다.

20세기 초반의 우루과이는 1차 산업으로 부를 축적해 남미 내에서 부유한 나라로 분류되었는데 이 시기를 겪은 선수들이 우루과이 축구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 1920년대~1930년대 초반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실제로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의 대회 베스트 11에 포함된 우루과이 선수 7명 중 6명이 1900~1910년대 사이 출생이며 당시 노장이었던 스카로네도 1898 출생으로 우루과이의 경제적으로 좋았던 시기를 겪었다.

자신의 고향인 몬테비데오를 연고지로 하는 론드레스의 3군, 스포츠맨 F.C의 2군에서 유스 시절을 보내고
15의 나이에 스카로네는 클루브 나시오날에 입단 테스트를 받았으나, 나시오날은 스카로네의 깡마른 체격을 이유로 떨어뜨렸다. 참고로 나시오날의 창단은 1899년이므로 스카로네보다 나이가 적었다는 점 또한 재미있는 사실이다.


나시오날의 입단 테스트에선 떨어졌지만 스카로네는 포기하지 않고 몸을 불렸고 1년뒤, 나시오날이 스카로네를 받아들였다. 당시 우루과이 축구를 지배하고 있던 나시오날이었기에 스카로네는 리저브 팀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스카로네는 이 시련조차도 이겨냈다. 5경기만에 시니어 팀으로 승격된 것이다. 엑토르는 빠르게 팀의 중심으로서 자리 잡아 기능해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2연패와 동시에 코파 리카르도 알다오 2연패를 이끌어냈다.

이런 활약으로 1917년 9월 2일에 우루과이 대표팀에 데뷔하게 된다. 우루과이의 전설적인 감독인 라몬 플라테는 캄페오나토 수다메리카노(지금의 코파 아메리카)에 스카로네를 출전시켰고, 스카로네는 3경기에서 2득점을 해내며 득점왕과 MVP를 달성해 조국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2. 고난과 역경 이겨내 바르셀로나로



나시오날의 2연패, 대표팀 성공적 데뷔와 우승 견인 등 최고의 한 해를 보낸 스카로네였으나 1918 시즌 시작 전에 불운한 일이 생긴다. 당시 팀의 주장이자 또 다른 나시오날의 전설인 압돈 포르테가 자신의 기량하락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며 나시오날에게 있어선 최악의 스타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카로네는 21득점을 해내며 우루과이 디비전 시즌 득점 기록을 갈아치웠고
팀의 준우승을 이끌며 좋은 활약을 보였다. 1919시즌엔 나시오날을 다시 우루과이 정상으로 만들었으며, 또 한 번 코파 리카르도 알다오를 우승시켰다.

이후에도 클럽에선 리그 우승 4회 국가대표에선 조국에서 개최한 1924년 대회를 포함한 캄페오나토 수다메리카노 우승 2회, 파리 올림픽 우승을 더하면서 계속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1925시즌 도중 우루과이 축구 협회와 FUF(Federación Uruguaya de Footbal)의 의견 불일치로 인해 리그가 중단되었고 나시오날은 중단된 리그를 대체하기 위해 5개월 간 38경기를 치르는 유럽 투어를 가지는데 스카로네는 26득점을 해내며 득점왕에 오른다.

스카로네는 특히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좋은 활약을 보이며 그들의 관심을 얻었고, 결국 1926년 1월에 바르셀로나로 이적한다. 이로인해 스카로네는 유럽에서 뛰는 최초의 우루과이 대표팀 선수 타이틀을 얻었다.(1910년에 AC 밀란에 입단한 훌리오 바바스트로가 있었으나, 그는 후에 이탈리아인으로 귀화함.)


3. 국가를 위해 바르셀로나마저 거절한 사나이



이적 후 스카로네는 친선경기 10경기에서 6득점을 기록하는 활약을 보였다. 프로페셔널리즘이 도래한 스페인이었기에 바르셀로나 또한 많은 급여를 약속했지만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출전이 복잡해지고 친정 구단인 나시오날로의 복귀가 어려워진다는 점으로 인해 바르셀로나를 떠나 다시 나시오날로 돌아간다.

"나는 다가오는 1928 올림픽, 하늘색 유니폼을 입고 뛸 고국, 더 이상 못 뛰게 될 나시오날도 생각했다.
서명하고 싶지 않았다. 승선하기 며칠 전에 그들은 내게 마지막으로 현금 3만 페소에 5년 계약을 제안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셀레스테스와 나시오날을 위해 돌아왔다."

이와 같은 스카로네의 조국과 나시오날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는 우루과이의 많은 팬들을 홀리게 만들었다.


4. 다시 한번 올림픽 우승 그리고 초대 월드컵


나시오날 복귀 후 이번에는 북미 투어에 참가하게 됐다. 19경기 23득점을 해내며 팬들의 기대를 불러일으켰으나
리그 재개 이후 스카로네는 여전히 좋은 모습이었지만 득점량은 줄어들어 나시오날에 덜 기용받기 시작한다.
나시오날은 번번이 우승에 실패하며 9년 후에야 다시 우루과이 정상에 서게 된다.

그러나 국가대표에서의 스카로네는 여전히 대단했다.
1927년 캄페오나토 수다메리카에서 우승을 놓쳤지만 불구하고 그는 3득점으로 득점왕에 올랐으며
많은 돈과 바르셀로나를 거절하면서까지 출전하고 싶었던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선 전경기 득점을 해내며 조국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초대 월드컵 당시 우루과이 선수진

스카로네를 중심으로 우루과이가 좋은 성적을 거두자 우루과이는 FIFA에게 월드컵 유치를 설득했고
그렇게 열린 대망의 1930년 초대 월드컵에서 우루과이는 우승을 거머쥔다.

31의 나이로 이젠 노장축에 끼는 스카로네는 페루전은 신경 쇠약 증상으로 인해 결장했고 해낸 득점이라곤 4대 0으로 승리한 루마니아 전에서의 1득점이 전부로 이전의 대회들을 생각한다면 아쉬운 스탯이었으나, 스카로네는 뛰어난 경기 영향력으로 눈부신 활약을 보이며 대회 베스트 11에도 뽑혔다. 그렇게 스카로네는 유종의 미를 거두며 셀레스테스를 은퇴한다.

여담으로, 스카로네의 우루과이 대표팀에서의 공식 경기 득점 기록은 52경기 31득점인데
스카로네는 2011년 10월 11일에 디에고 포를란이 깨기 전까지 79년 동안 우루과이 국가대표 역대 최다 득점자로 기록되었다.


5. 오래된 나이와 새로운 도전 그리고 마침표를 찍다.


엑토르 스카로네와 인테르 선수진


구단에서 덜 기용받던 것이 스카로네에겐 새로운 도전의 계기가 되었다. 1931-32시즌에 이탈리아의 인테르로 이적한 스카로네는 14경기 7득점을 해내며 주세페 메아차와 함께 좋은 활약을 보였다. 특히 라치오와의 경기에서 얼굴에 타격을 입어 안면이 피범벅인 상황에서 2골을 집어넣어 라치오 팬들에게 그에게 가리발디(이탈리아 통일에 영향을 끼쳐 이탈리아 내에서 애국영웅으로 칭송받는 혁명가이자 군인)란 별명을 얻게되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천하의 스카로네도 나이를 이겨내긴 버거웠고 인테르에서 부상에 시달리게 된다.

이후엔 세리에 A로 막 승격한 팔레르모로 이적해 두 시즌을 활약했고 나시오날 복귀 후엔 다시 한 번 더 리그 우승을 경험한다. 스카로네에겐 8번째이자 마지막 리그 우승이었다. 스카로네는 점점 운동선수로서의 멘탈적인 부분에서 문제를 보이며 출석일 수 부족으로 벌금을 내는 등 구단과 마찰을 겪었다. 결국 1937년엔 원더러스로 이적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또 한번 나시오날로 복귀하지만 앞서말한 멘탈적인 부분과 기량 하락의 문제와 겹쳐져 스카로네는 1938, 1939 두 시즌간은 비공식 경기에만 출전 할 수 있었다. 결국 그 두 시즌을 끝으로 스카로네는 은퇴를 하게 되었다.

은퇴 후엔 식료품점을 열기도 했지만 지도자 활동을 하며 피치에 더 머물렀고,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직까지도 맡았으나 뚜렷한 족적 없이 감독 생활을 끝냈다.


스카로네의 일생을 살펴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나시오날 입단 테스트 탈락, 동료의 안타까운 선택, 나이와 부상으로 인한 멘탈의 과부하
또한 우루과이는 경제 대공황 또한 제대로 겪은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하기에 스카로네의 일생에는 정말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쾌감이 함께 있는 일생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입단 테스트에서 떨어져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다시 도전해 나시오날 입단에 성공한다.
그리고 다섯 경기만에 리저브 팀에서 1군으로 승격, 데뷔 후 무서운 활약을 보이는 모습은 나시오날에게 '니들 나 놓쳤으면 어쩔 뻔했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해 통쾌함을 안겨주고

거금의, 그것도 바르셀로나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면서까지 조국을 위해 헌신하려 했고
결과적으로도 올림픽 우승 2회와 초대 월드컵 우승을 이끌어내거나, 얼굴이 피범벅이 된 상태에서 2골을 집어넣는 일화 등 헌신적 투지로 결과까지 이루어내는 스카로네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감명을 준다.

해당 선수의 생일이기에 업로드하는 '풋볼리스타 데 호이'이지만 스카로네의 일생은
때마침 진행 중인 월드컵 대회의 경기를 앞두고 떠올려보기에도 좋은 스토리라고 생각한다.

이미 루이스 수아레스, 에딘손 카바니, 디에고 포를란으로 인해 우루과이 최다 득점자 4위로 물러난 스카로네이지만 그가 쓴 득점 기록을 비롯한 업적들을 뛰어넘기 쉽지 않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과연 이번 월드컵에서 우루과이의 차세대 공격수로 주목받고 있는 다르윈 누녜스를 비롯한 황금세대로 평가받는 우루과이의 젊은 선수들이 스카로네의 업적을 재현해내거나 뛰어넘을만한 재능을 지닌 선수인지 지켜봐 보는 것도 세계인의 축제를 즐기는 꽤 재미있는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