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타 데 호이

[풋볼리스타 데 호이] 발칸반도의 마라도나라고 불렸던 사나이, 게오르게 하지

파울리노 하나 2023. 2. 6. 05:54


풀네임: 게오르게 하지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국적: 루마니아
출생일: 1965년 2월 5일

클럽 경력:

1982 - 1983 FC 콘스탄차

1983 - 1987 스포르툴 스투덴체스크

1987 - 1990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1990 - 1992 레알 마드리드

1992 - 1994 브레시아 칼초

1994 - 1996 바르셀로나

1996 - 2001 갈라타사라이

통산 경기: 약 770경기 (스페인 국가대표 124경기)



1. GENIU


1965년, 2월 5일 아버지 란쿠 하지와 어머니 키라타 하지 사이에서 게오르게 하지가 태어난다. 하지는 아로마니아의 피를 지니고 있었고 양치기였던 할아버지는 그리스에서 루마니아로 도망친 40,000의 아로마니아인 중 하나였다. 하지는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였다. 후에 말하길 할아버지와 함께 치즈와 토마토를 즐겨 먹었으며 이는 아직도 하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한다.

 

10살에 콘스탄차에 입단해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한다. 이오시프 뷔코시 감독의 아래에서 성장하며 U-16, U-17, U-18 루마니아 올림픽 대표팀에 소집되면서 천재 소리를 들었다. 17살의 나이에 시니어 데뷔도 콘스탄차에서 하게 되었고 첫 시즌에 18경기 7 득점이란 호기록도 남겼지만 구단은 강등당해 버렸고 하지는 이적을 하게 된다.

 

우니베르시타테아 크라이오바로의 이적이란 선택지도 있었지만 (당시의 크라이오바는 지난 시즌 리그 우승, 이번 시즌 리그 2위를 기록한 최고의 선택지 중 하나였다.) 수험을 합격해 경영학을 공부하려던 하지의 선택은 부쿠레슈티 지역의 스포르툴 스투덴체스크였다. 하지는 스포르툴 스투덴체스크에서 축구를, 부쿠레슈티 대학에서 경영학을 병행했다.

부쿠레슈티 대학

 

이 시기에 성인 국가대표 팀에 데뷔하게 되었다. 데뷔 다음 해에 열린 유로 84에 참가했으나 당시의 하지의 팀 내 입지는 크지 않았기 때문에 별 활약 없이 디펜딩 챔피언 서독과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한다. 1986 월드컵 예선에선 하지가 국가대표 주장으로 선임되기도 했지만 루마니아는 월드컵 진출을 실패한다.

스포르툴 스투덴체스크에서 미르체아 산두, 지노 이오르굴레스쿠, 마르셀 코라스 등의 구단 레전드들과 함께 경기를 뛰며 통산 118경기 88 득점에 루마니아 리그 득점왕 2회, 가제타 스포르투릴로 선정 1985년의 루마니아 선수에 빛나는 활약을 보인 하지는 루마니아 최고의 클럽 중 하나이자 1985-86 유러피언 컵 챔피언인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로 이적하기에 이른다. 사실 부쿠레슈티는 하지를 완전 영입할 생각이 없었다. 원래의 계약은 1987년 2월 24일에 치루어질 UEFA 슈퍼컵에 결승전 단일 경기 임대였으나, 해당 경기에서 하지가 44분경에 프리킥으로 결승골을 터뜨리는 등의 좋은 활약을 보여 완전 영입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1986 UEFA 슈퍼 컵 결승 게오르게 하지의 득점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부쿠레슈티의 회장인 발렌틴 챠우셰스쿠가 루마니아의 정권을 쥐고 있던 독재자, 니콜라에 챠우셰스쿠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는 클럽에서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역대 최다 득점자 앙겔 요르더네스쿠, 역대 최다 출장자 투도렐 스토이카와 미오드라그 벨로데디치, 가브릴 발린트, 스테판 이오반, 마리우스 라카투슈, 빅토르 피슈르카 등의 루마니아 국가대표 동료들과 함께하며 전성기를 보내게 된다.


2. 독수리 군단에서의 실패



하지는 플레이메이커로서 팀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 스코어러적인 면모 또한 유감없이 발휘했다. 1986년 6월부터 1989년 9월까지 이어진 부쿠레슈티의 리그 104경기 무패 행진과 리그, 컵 3연패에 기여하며 1987 가제타 스포르투릴로 선정 루마니아 올해의 축구 선수에 오르기도 했다. 1987-88 유러피언 컵에선 팀을 준결승으로 이끌며 득점왕을 수상 받았고, 1989-90 시즌엔 결승까지 이끌었으나 '밀란 제너레이션' AC밀란에게 4 대 0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의 유러피언 컵 활약은 AC 밀란, 유벤투스, 바이에른 뮌헨 등의 구단에게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정권은 하지의 해외 이적을 금지했다. 하지는 니콜라에 챠우셰스쿠에게 수영장이 있는 별장과 메르세데스 벤츠를 받는 등 루마니아의 경제가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부유를 누렸다. 그러나 1989년 12월에 일어난 루마니아 혁명으로 인해 루마니아의 공산정권은 무너졌고 하지의 해외 이적 또한 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1990년 5월에 4억 페세타라는 당시 구단 역대 최고 이적료를 지불시키며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해 첫 해외진출을 하게 된다.

 

 

이적 후에 맞이한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와 소련을 상대해야 하는 B조에 속하게 되었으나, 카메룬과 함께 돌풍을 일으키며 조 2위로 16강 진출에 성공한다. 16강에서 스웨덴과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배하게 되지만 레알 마드리드 팬들의 기대를 높이기엔 충분했다.

거액의 이적료에서도 드러나듯  'La Quinta del Buitre 독수리 군단' 레알 마드리드가 하지에게 건 기대는 매우 컸지만 스페인 축구와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이 필요했기에 첫 시즌은 실망스러웠다. 루마니아에서 게오르게 하지는 피치의 안과 밖에서 '왕'과 같은 권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레알 마드리드에선 그러한 권력을 가지는 것이 불가했다. 유소년팀 출신이자 팀의 중심인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미겔 파드레사, 마놀로 산치스, 미첼, 마르틴 바스케스 등의 선수들이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독수리 군단을 대표하는 유스 출신 5인

그래도 다음 시즌인 1991-92 시즌, 라도미니 안티치 감독 아래에선 개선된 플레이를 선보였다. 아틀레틱 빌바오를 상대로 거둔 5 대 0 승리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고 팀 또한 리가 1위를 기록 중이었으나 안티치 체제에서 라이벌 구단을 상대로 좋지 못한 성적을 기록한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 구단측은 시즌도중 안티치를 경질시키고 과거 레알 마드리드 감독직을 맡아 좋은 성적을 냈으며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기술이사였던 레오 베인하커르를 감독으로 선임시켜 버린다. 구단측의 기대와 예상과는 달리 새 체제에서의 경기력과 성적은 하향세를 그렸고 결국 한 시즌동안 아무 트로피도 들지 못하게 되었다. 개선 중이었던 하지였지만 비판의 화살은 시즌동안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을 보인 하지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게 된다.


3. 발칸 마라도나의 정점, 1994 미국 월드컵


80억 리라의 이적료를 발생시키며 이탈리아 세리에 A 승격팀인 브레시아 칼초로 이적했는데, 레알 마드리드 시절과 같은 연봉을 협상할 수 있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루마니아 국가대표에서 지도받아봤던 미르체아 루체스쿠 감독의 존재가 컸다. 이적한 1992-93 시즌에 브레시아는 강등당해 버렸지만 그다음 시즌에 조금씩 하지의 진가를 드러내며 다시 한번 팀을 승격시켰다.

 

다시 한번 찾아온 월드컵 무대, 1994 미국 월드컵에서의 루마니아는 4년 전보다 더 주목도가 떨어지는 팀이었고 하지 본인 또한 2부 리거였기에 기대치는 높지 않았다. 하지는 조별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팀을 16강으로 이끌었다. 특히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우승후보라는 평가까지도 받던 콜롬비아를 상대로 1 득점 2도움의 뛰어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팀의 3 대 1 승리를 이끌어내는 모습은 발칸 마라도나의 건재함을 보여줬다.


콜롬비아전 게오르게 하지의 활약


16강에서는 우승 후보였던 아르헨티나를 만났지만 디에고 마라도나는 약물복용 문제로 결장한 상태였고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1득점 1 도움을 기록하며 루마니아 월드컵 역사상 최고 성적인 8강을 이끈다. 8강에선 다시 한번 스웨덴을 만났는데 기적적으로 연장전으로 끌고 가는 플로린 라두치오유의 득점을 도우며 또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펼치지만 또 승부차기에서 스웨덴에게 패배해 탈락한다. 그러나 뛰어난 활약을 펼친 하지는 '대회 베스트 11'과 옹즈드 옹즈, 가제타 스포르투릴로 선정 루마니아 올해의 축구 선수, 발롱도르 4위 , FIFA 올해의 선수 4위에 선정된다.


4. 드림팀에서의 실패와 유종의 미


하지의 월드컵 활약은 하지의 기량의 건재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정상급 구단들의 관심을 끓었다. 미카엘 라우드럽의 대체자를 찾고 있던 바르셀로나의 요한 크라이프 감독이 게오르게 하지를 영입하게 되었다.

 

이로써 바르셀로나는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호마리우, 게오르게 하지 1994 미국 월드컵 베스트 11 중 셋을 보유한 팀이 되었다.

 

크라이프 감독 또한 인터뷰에서 하지가 라이벌 구단으로 이적한 라우드럽의 두 배의 득점과 라우드럽보다 더 많은 도움을 기록할 것에 내기를 걸겠다며 기대감을 내비쳤으나 이번엔 부상이 문제였다.

1995-96 UEFA 컵에서 5 경기 3 득점을 기록한 것과 같이 분명 피치 위에서 번뜩이는 순간이 없진 않았으나, 계속되는 부상으로 폼을 정상궤도에 올리기엔 무리가 있었고 결국 바르셀로나마저도 떠나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의 다음 행선지는 튀르키예의 갈라타사라이였다. 축구변방 지역이었으나, 이곳에서 하지는 제2의 전성기를 보내게 된다. 주장으로 리그 4연패도 튀르키예 올해의 축구 선수에 3번 선정되기도 하고 튀르키예에서 들 수 있는 트로피는 거의 전부 들어봤다. 1999-00 UEFA컵 결승에서 아스날과 만나기도 했는데 당시 하지의 나이는 35이었지만 성질머리는 여전했는지 연장전에서 아스날의 주장인 토니 아담스를 구타하고 퇴장당하기도 했으나 트로피는 갈라타사라이의 것이었다.

UEFA 슈퍼컵에서는 전 소속팀인 레알 마드리드를 이기고 트로피를 가져왔다. 좋은 성적으로 주목받은 갈라타라이의 선수들이 줄줄이 이탈할 때 노장인 하지는 묵묵히 자리를 지키다 2001년에 축구화를 벗게 된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선 다시 한번 루마니아의 16강 진출을 이끌고 국가대표를 은퇴하지만, 번복하고 유로 2000에 참가해 조국의 8강 진출을 이끌어냈으나 8강에서 퇴장당하며 이탈리아에게 패배당했고 그렇게 하지의 국가대표 커리어는 막을 내렸다.


 

루마니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플레이메이커.

 

뛰어난 드리블 능력과 넓은 시야, 정확한 패스를 갖추고 있었으며 중장거리 킥력과, 데드볼 득점력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선수.

 

루마니아 대표선수로서 복병이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준 발칸 반도의 마라도나.

그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 남기며 포스팅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