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네임: 리카르도 사모라 마르티네스
포지션: 골키퍼
국적: 스페인
출생일: 1901년 1월 21일
클럽 경력:
1916 - 1919 에스파뇰
1919 - 1922 바르셀로나
1922 - 1930 에스파뇰
1930 - 1936 레알 마드리드
1937 - 1938 니스
통산 경기: 명확한 자료 없음. (스페인 국가대표 46경기)
1. "사모라가 있으니 괜찮다" - 페드로 기베르트
스페인 축구의 태동기였던 1901년 1월 21일, 바르셀로나에서 리카르도 사모라가 태어난다. 사모라는 14살 까지는 의학공부와 바스크 펠로타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서 발달한 전용 도구를 이용한 구기종목)를 병행했지만 우연히 축구경기를 보게 되었고 펠로타보단 축구에서 공을 잡는 것이 더 쉬워 보였기에 축구의 길로 들어선다.
사모라는 다른 구단과의 친선경기를 치르고 대학교 팀에 입단해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에 참가하는 등 유스 경력(당시엔 대학교 팀도 레알 마드리드와 같은 구단과 맞붙었기에 유스라 딱 잘라 말하기엔 무리인 점도 있습니다.)을 보낸 뒤, 에스파뇰에 입단하게 된다. 에스파뇰은 당시로선 꽤나 강한 구단이었는데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 우승 6회, 코파 델 레이 준우승 2회에 빛나는 구단이었다.
그런데 사모라가 입단한 지 얼마 채 안되었을 무렵에 에스파뇰의 전설적인 골키퍼인 페레 기베르트가 갑작스럽게 은퇴했다. 그는 은퇴를 하며 리카르도 사모라가 있으니 두려워할 것 없다고 말했다.
2. 바르셀로나 황금세대를 열다
1917-18시즌, 사모라는 에스파뇰을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의 우승을 이끌면서 기베르트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냈으나, 사모라의 부모님은 사모라가 다시 의학공부를 재개하길 바랐다.
에스파뇰의 전설적인 수비수이자 사모라의 팀 동료였던 프란 시스코 아르메트는 일찍이 사모라의 재능을 알고 계속해서 사모라를 축구의 길로 이끌어가기 위해 설득했지만, 축구의 프로화가 진행되지 않은 당시에 축구는 돈벌이가 되지 않는 일이었으니 부모님의 바람도 충분히 이해 가능했다. 그렇게 사모라가 축구를 관두나 싶었으나 사모라의 소속구단인 에스파뇰의 라이벌이자 스페인 내에서 강팀이었던 바르셀로나로부터 큰 액수의 제안이 들어왔고 이를 받아들여 부모님의 반대에도 약속을 깨고 축구를 계속하게 된다.
"나는 공부를 마무리하기 위해 축구를 그만두겠다고 부모님과 약속했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 친구들을 만나 놀았고 바르셀로나의 이사회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들이 내가 다시 부츠와 장갑을 잡도록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리카르도 사모라
사모라는 라이벌 구단인 바르셀로나로 이적 후에 잭 그린웰 감독 아래에서 파울리노 알칸타라, 주제프 사미티에르, 펠릭스 세수마가, 에밀리 사기-바르바 등의 선수들과 함께 바르셀로나의 황금기를 열게 된다.
1920년엔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 강팀이었던 아틀레틱 클루브를 2 대 0으로 꺾으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 해엔 엔트워프 올림픽을 위해 스페인의 축구 국가대표팀이 처음으로 결성되었고 사모라는 클럽 동료였던 주제프 사미티에르와 사모라가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 꺾은 아틀레틱 클루브의 전설인 피치치, 호세 마리아 벨로스테와 함께 초대 스페인 국가대표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폴 니엘센과 프리츠 타르프로 대표되는 덴마크를 1 대 0으로 이겨내는 등의 활약을 보이며 조국에게 은메달을 선물해 냈다.
이후에도 좋은 활약을 한 사모라의 바르셀로나는 3시즌 동안 코파 델 레이 우승 2회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 우승 3회를 기록했다. 그러나 사모라는 바르셀로나에 급여인상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친정팀이자 바르셀로나의 라이벌 구단인 에스파뇰로 복귀한다.
3. 레알 마드리드, 그리고 스페인 내전
라 리가가 출범한 1928-1929시즌, 사모라의 에스파뇰은 1929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2 대 1로 꺾고 우승하고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까지 우승했고 국가대표팀에선 잉글랜드를 4 대 3으로 꺾으며 영국제도 밖의 국가 중 잉글랜드를 이긴 최초의 국가로 기록되었다. 3실점을 기록한 사모라였지만 후에 밝혀지길 흉골이 부러진 상태로 경기에 출전했다고 한다. 사모라의 놀라운 활약에 레알 마드리드는 당시 거액이었던 15만 페세타를 지불하여 사모라를 영입했다. 당시 에스파뇰의 파트리시오 카이세도 회장은 지불할 구단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요구한 이적료였으나, 레알 마드리드의 루이스 우세라 회장은 기꺼이 지불해 냈다.
1930년 10월 15일에 치러진 마드리드 더비에선 쇄골이 부러지고 상완골이 탈골되는 큰 부상을 입는 등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사미티에르가 설득해 데려온 치리아코 에라스티, 하신토 킨코세스와 함께 전설적인 수비라인을 이루며 레알 마드리드의 라 리가 2연패를 이끈다. 국가대표에서 지휘받아봤었던 프란시스코 브루 감독 아래에서 1934년, 1936년 코파 델 레이 우승 또한 해냈는데, 1934년 결승전에선 바르셀로나 한솥밥을 먹던 잭 그린웰 감독이 이끄는 발렌시아를 2 대 1로 이겼고 1936년엔 친정팀인 바르셀로나를 만나서 2 대 1로 제압했다. 특히 떠오르는 신성이었던 주제프 에스콜라의 경기 막판 혼신의 슛을 사모라가 선방해 낸 것이 컸다.
초대 월드컵은 스페인이 참가하지 않았기에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이 사모라의 첫 월드컵이었는데 주장으로 출전해 16강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페널티 킥을 선방해 내는 등의 좋은 경기력을 보이며 조국의 3 대 2 승리를 이끌었고 8강에서 개최국인 이탈리아를 만나게 된다. 주세페 메아차, 지오반니 페라리 등 빼어난 이탈리아의 공격수들을 상대로 경이로운 수준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무승부를 이끌었으나 부상으로 인해 재경기엔 출전이 불가했고 결국 스페인은 재경기에서 이탈리아에게 1 대 0으로 패배한다.
1935-36 시즌 종료 후에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고 사모라는 몇 주간 숨어 지내다가 스페인 제 2 공화국군에 의해 투옥되어 사형 위기까지 처했으나, 아르헨티나 대사관의 중재덕에 석방되었고 1937년 1월에 증기선을 타고 프랑스 마르세유로 망명을 갔고 3월엔 프랑스의 니스에 정착하게 된다. 이후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스페인 국가대표 동료였던 주제프 사미티에르와 함께 OCG 니스에서 코치 겸 선수로 남은 선수 경력을 보내게 된다.
라이벌 구단인 에스파뇰에서 바르셀로나로 와서 에스파뇰로 이적 후 바르셀로나의 최대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는 행보를 보이며 여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기량은 출중했던 선수였다. 뛰어난 신체 조건을 잘 이용해 안정성이 뛰어난 골키퍼였으며 화려한 선방쇼도 보여줄 수도 있었던,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문장 중 하나로 평가받는 선수다.
2016년 4월 20일엔 에스파뇰이 사모라의 데뷔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셔츠를 팀의 골키퍼인 파우 로페즈에게 입히고 경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스페인의 언론사인 마르카는 1958년부터 매 시즌 라 리가에서 가장 낮은 실점률을 기록한 골키퍼에게 리카르도 사모라의 이름을 딴 트레페오 리카르도 사모라(사모라상)를 수여한다. 스페인 내 최고의 골키퍼는 아직까지도 사모라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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