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서 유소년 선수를 특정 유형의 선수로 육성시키는 방향으로 힘쓰기 시작한 시발점은 어디일까. 힘과 경합을 중시한 잉글랜드? 압도적인 온더볼 기량을 숭상한 브라질? 전술적 이해도와 대응력을 추구하던 이탈리아? 떠오르는 곳들이 여럿 있으나, 현대 축구의 근간이 되는 체계적인 선수 육성의 시발점은 네덜란드, 아약스였다.
아약스 철학의 구체화는 리누스 미헐스와 요한 크라이프 - 루이 반 갈 세대에서 시작되었다. 모두 공격과 수비 상황에서 선수들의 유기적이고 연쇄적인 움직임을 통해 공격 상황에선 공간을 극대화시키고 수비 상황에선 상대의 공간을 제한하고자 하는 철학을 지니고 있었다.
그 철학을 피치 위에서 구현하기 위해, 그들은 수비 상황에서 하프라인을 상대의 공간을 제한하고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공략해야하는 선으로 재정리했다. 이런 성향은 1974 서독 월드컵의 미헐스 감독의 네덜란드에서 가장 시각적으로 잘 드러났다. 네덜란드는 공 소유권이 상대에게 넘어갔을 때, 재빨리 골키퍼를 제외한 전 인원이 하프라인을 향하는, 파격적인 하프라인 공략을 보여줬다.
이 오프사이드 트랩은 최종 수비수가 하프라인 부근에서 머물러야 기능할 수 있는 전술이었다. 본래 하프라인 부근은 미드필더의 영역이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야 이 공간에서 미드필더가 공이 뺏기더라도 수비라인의 커버로 위기를 막아낼 수 있었으나, 하프라인에 중앙 수비수를 위치시키는 미헐스의 네덜란드는 하프라인 부근에서 상대에게 소유권이 빼았길시에 곧바로 상대 공격수에게 골키퍼와의 1대 1 찬스를 내줄 위험을 껴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헐스는 수비라인의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공을 소유하고 미드필더처럼 기능하길 바랐다. 하프라인 부근은 상대 선수를 끌어내고 라인의 간격과 선수 사이의 간격을 만들어내며 경기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선 반드시 활용해야 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미헐스는 3번과 4번(중앙 수비수)이 10번(플레이메이커)의 역할도 겸비하길 바란 것이다.
실제로 미헐스의 축구 철학에 큰 영향을 받은 반 갈 감독은 현대 축구에서 공격형 미드필더에게 주어진 공간은 제한적이니 중앙 수비가 플레이 메이커가 되어야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미헐스는 이를 위해 본포지션이 라이트 백인 빔 라이스베르헨과 월드컵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중앙 수비수로 뛰어본 적이 없는 아리 한을 주전 중앙 수비수로 동시 기용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그들은 전문 중앙수비수가 아니었기에 압도적인 신체능력을 지니고 있진 않았지만 두뇌의 회전이 빨랐기에 상대 공격수를 오프사이드의 늪으로 빠뜨리며 공간을 제한했고, 조율자로서의 역할 또한 훌륭하게 수행해 냈다. 결국 이때의 네덜란드는 월드컵 준우승이란 월드컵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모든 팀이 1974 네덜란드의 전술은 국가대항전 특성상 클럽보다 전술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국가대표팀을 상대한 것과 요한 크라이프라는 당대 최고의 사령관이 있었던 덕에 제 기능을 할 수 있던 것이었으며 리스크가 너무 컸기에 그 상태로 세계 축구의 트렌드가 되진 못했다. 또한 대다수의 팀들은 그 전술을 구현에 최적화된 선수진을 구축하고 있지 않았다.
1990년대에 이르러 오프사이드 룰이 동일선상을 허용하고 직접적으로 관여한 공격수만 반칙이 적용되도록 개정되자 파격적인 오프사이드 트랩의 움직임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악재속에서도 아약스와 네덜란드식 축구철학은 무너지지 않고 이어져 후대에 프랑크 레이카르트, 다니 블린트, 로날드 더부르 등 선구적이며 세계적인 수비수들을 배출했고, 이들의 축구 철학은 크라이프, 반 갈을 거치며 '발밑이 뛰어난 레귤러 + 대인 수비 능력이 뛰어난 이레귤러'의 형태로서 바르셀로나에 각인된다.
철학의 형성이 명확해지기 시작한 점은 크라이프 감독의 바르셀로나 부임과 로날드 쿠만의 영입이었다. 완벽한 볼 플레잉 수비수였던 로날드 쿠만은 바르셀로나식 중앙 수비수 모델을 제시했다.
드림팀의 붕괴 이후 선임된 루이 반 갈은 볼플레잉 능력이 탁월해 바르셀로나 축구 철학의 '레귤러'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로날드 더부르를 영입하곤 그 짝으로 헤더 경합과 대인수비 능력이 뛰어나 '이레귤러'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아벨라르도를 배치했다.
반 갈 감독 이후에도 라파 마르케스 + 카를레스 푸욜, 제라르 피케 + 카를레스 푸욜 등으로 이런 형태의 조합은 계속되었고 현재에 이르러선 쥘 쿤데, 이니고 마르티네스 + 로날드 아라우호로서 그 계보를 잇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로날드 아라우호가 보여주는 득점의 행보가 이레귤러 중에서도 이레귤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아라우호는 라 마시아 출신이지만, 라 마시아에서 키운 선수는 아니다. 그는 우루과이 리그에서 프로 데뷔를 마친 후에 바르셀로나 리저브 팀으로 이적한 케이스였다. 즉, 큰 틀은 이미 만들어진 선수였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페란 올리베라, 메구엘리, 호세 라몬 알렉산코, 로날드 쿠만, 로날드 더부르, 라파 마르케스, 제라르 피케 등. 아라우호 이전에도 바르셀로나에 득점 클러치 능력이 대단한 중앙 수비수들은 많았다.
그러나 아라우호는 어떤가? 볼 컨트롤 능력과 패스 능력은 바르셀로나 미달급으로 평범한 수준이고 빌드업 상황에선 중심에서 벗어난 역할을 하며 오히려 약점으로 치부되는 수준이다. 그런데 또 운동능력은 축구선수 중 일류급인, 위의 선수들과 반대 성질이자 바르셀로나의 철학에 반하는 '이레귤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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