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는 예나 지금이나 우수한 지도자를 다수 배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 중 제일은 누구일까? 아마 라이트 팬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는 현역 감독으로 활약 중인 카를로 안첼로티일 것이다.
그렇다면 안첼로티 이외의 감독중에서도 이탈리아와 세계 축구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감독은 누가 있을까?
내 머릿 속엔 넷 정도가 떠오른다. 이들 중 하나는 지나치게 공격 중심적인 축구에서 수비를 고려하기 시작한 혁명가였으며, 하나는 이탈리아식 축구의 방향을 잡아준 인도자였고, 하나는 이탈리아의 보수적인 성향에 반발하는 진보적 괴짜 철학가였으며, 또 하나는 전술적 대처능력의 유연성으로 이탈리아식 축구의 전형을 보여준 전술가였다.
비토리오 포초
비토리오 포초 감독에 대해 말하기 전에 1925년 개정 전의 오프사이드 룰과 피라미드 포메이션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1925년 개정 전까지 약 60년 동안 오프사이드는 공이 공격수에게 전진 패스 되었을 때에 상대 골라인과 공격수 사이에 최소 '3명'의 선수가 있지 않을 시에 발동되었다.
때문에 공격수는 반드시 두 명의 최종 수비수와 골키퍼의 뒤에서 공을 받아야만 했으며, 공격수를 막아내기에 최후방 수비수는 두 명이면 충분했다. 이러한 발상에서 만들어진 것이 1-2-3-5 대형, 일명 '피라미드 포메이션'이었다.
그러나 1925년, 오프사이드 룰이 공격수와 상대 골라인 사이 선수의 인원이 최소 2인으로 바뀌며 공격에 유리하게 재정되었고, 후방의 최종 수비수를 2명만으로는 공격상황에서의 대처가 불안해졌다.
이러한 단점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아직까진 피라미드 대형 이용이 지배적이었던 1934년, 이탈리아에서 월드컵이 개최된다. 당시 이탈리아의 최고 지도자이자 독재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는 월드컵에서의 성공을 통해 파시즘의 성공을 세계에 보여주고 싶어 했다.
경기의 심판 명단을 직접 골랐을 정도로 무솔리니의 야망은 광기에 가까웠다. 그리고 무솔리니의 야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시에 대표팀 구성원들의 신변은 위험해질 것이 뻔했다. 이런 간절한 상황에서 포초는 피라미드 포메이션을 변형시켜 새로운 형태의 포메이션을 월드컵에 기용한다. 포초의 선택은 아웃사이드 포워드(윙)와 센터 포워드 사이에 위치한 양 포워드를 다른 포워드들보다 아랫선에 위치시키는 것이었다. 이 포지션이 바로 '인사이드 포워드'다.
인사이드 포워드는 기존의 자리보다 낮은 위치에서 더 다양한 역할을 부여받으며, 플레이메이커의 성향을 보였다. 이들이 하프 백들의 중원에서의 부담을 덜어주었으며 덕분에 하프백들은 수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것이 '메토도(Metodo)' 대형이다.
당시의 축구는 골대 근처에 많은 인원을 배치하는 것이 득점에 있어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했기에 5명의 공격수를 기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탈리아가 메토도 대형을 발상해 낼 수 있던 이유는 당대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지닌 포워드를 둘이나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토도의 인사이드 포워드에 위치한 주세페 메아차와 조반니 페라리는 당대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지닌 흠잡을 곳 없는 선수들이었고, 높은 축구 지능을 지니고 있었기에 플레이메이커로서도 잘 기능할 수 있었다.
1934 월드컵에서의 이탈리아는 공포였다. 인사이드 포워드가 중원에 가담하면서 루이스 몬티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파괴적인 센터하프가 수비에 집중할 수 있었으며, 몬티에게서 아무리 거친 플레이가 들어와도 무솔리니가 고른 심판이 이탈리아에게 유리하도록 판정을 내렸기에 상대하는 입장에선 절망을 그 자체였다.
특히 이는 4강 오스트리아전에서 잘 드러났는데, 공교롭게도 이 당시 오스트리아 또한 '포워드의 플레이메어커화'를 선구 한 이들 중 하나였다. 그들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였던 마티아스 진델라는 빠른 속도를 보유했으며 섬세한 기술을 구사한 선수로, 수비수와의 몸싸움을 허용하지 허용하지 않는 선수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몬티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이들은 진델라와의 맞대결에서 다른 의미로 몸싸움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경기 내내 진델라를 반칙성 플레이로 공격했고, 모차르트를 침묵시켰다.
당시 진델라의 나이가 30대이긴 했으나, 그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만약 이 정도의 반칙성 플레이를 불허하는 속도를 지닌 선수가 현존한다면 그는 아마 축구화가 아니라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이탈리아의 플레이는 상식에서 벗어나있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결승 진출권을 이탈리아에게 내줬고, 이탈리아는 결승에서 체코를 꺾으며 1934 월드컵을 우승한다.
언뜻 보면 포초는 판정 이득을 보는 상황에서 최적화된 대형을 만들어낸 것 같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메토도의 발상은 거기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1934 월드컵에서 유일하게 메토도의 우수성은 거짓된 것이 아니었다. 기존의 피라미드 포메이션이 지니고 있던 구조적인 약점을 보완한 전술이었던 메토도는 1934 월드컵 후에도 이탈리아에게 1934 올림픽과 1938 월드컵 우승을 가져왔다.
또한 축구사적인 의미의 측면에서도 메토도는 수비를 보완하기 위해 공격진 선수의 위치를 내리기 시작한 지점 (엄연히 따지면 '1925 오프사이드 룰 개정 후'이다. 윗 선의 선수들을 아랫 선으로 내린 축구사적 첫 사례는 피라미드 포메이션일 것이다. 1 수비 9 공격이 지배적이었던 축구가 스코틀랜드 축구의 영향을 받아 패스란 요소를 고려하게 되면서 공격 5, 수비 5의 대형으로 변화되었다.) 중 하나로서 수비를 중요시 여기고, 어떻게든 승리를 추구하는 이탈리아식 축구관점의 뿌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비토리오 포초 감독과 메토도는 결코 빛바래지 않을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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