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타 데 호이

[풋볼리스타 데 호이] 노예의 후손, 국가의 영웅 이사벨리노 그라딘

파울리노 하나 2023. 7. 8. 18:35


풀네임: 이사벨리노 그라딘

포지션: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국적: 우루과이
출생일: 1897년 7월 8일

클럽 경력:
1915 - 1921 페냐롤
1922 - 1929 올림피아

 

통산 경기: 명확한 자료 없음



1. 노예의 후손


그라딘의 증조부는 레소토왕국의 노예 출신이었으며 많은 이민자들이 우루과로 건너오던 18세기 후반에 그라딘의 증조부또한 우루과이로 건너와 생활했고 시간이 지나 1897년 7월 8일, 증손 이사벨리노 그라딘이 태어난다.
 
세계에 백인우월주의 사상이 너무나도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20세기 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라딘을 비롯한 흑인들에게서 거부감을 느꼈다. 그러나 당시 우루과이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국익을 위해 복지 정책을 펼치고 인종 간의 마찰도 최소한으로 하려 노력하는, 진보적이며 평등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는 국가였다. 그라딘이 이후 얻게 되는 스포츠적 영광 또한 이 영향이 컸다.

 
그라딘의 집안은 매우 가난했다. 노예 출신 이민자 집안이었으니 가난이 당연했다. 그러나 찢어질듯한 가난함 속에서도 언제 어디서든 즐길 수 있는 것이 축구였다. 그라딘또한 여타 재능 있는 축구선수들이 그러했듯 마을의 공터에서 공을 차며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고 그곳에서 재능을 발견한다.
 
시간이 지나, 1913년. 당시 우루과이 3부 리그 팀이었던 클루브 아그라 시아다에 15세의 그라딘이 입단하게 된다. 이 어린 흑인이 우루과이의 축구팬들에게 인정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15년엔 페냐롤에 입단하게 되며 본격적인 프로 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2. 하얀 영혼을 지닌 흑인


페냐롤에서도 순식간에 재능을 증명해 낸 그라딘은 해당 연도에 국가대표 승선까지 해냈고 초대 남미 챔피언십(코파 아메리카의 전신)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국가대표에는 그라딘과 같은 흑색인종인 후안 델가도 또한 있었다.

1916 우루과이 대표팀, 우루과이의 흑인 미드필더 후안 델가도

첫 경기의 상대는 칠레였는데, 관중들은 그라딘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첫 충격은 그라딘의 검은 피부색이었지만 그것은 그들이 잠시 후에 받을 충격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었다. 그로딘은 해당 경기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고, 페냐롤 동료였던 호세 피엔디베네와 함께 멀티골을 기록하며 팀의 4-0 승리를 이끌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칠레 대표팀은 해당 경기 전부터 우루과이 대표팀이 그라딘과 델가도를 기용하는 것에 대해 우루과이인이 아닌 아프리카인을 기용한다며 불만을 표했는데, 그라딘의 눈부신 활약으로 경기를 패배한 후엔 불만이 더 커지기도 했다.
 
대회 첫 경기부터 흐름을 탄 그라딘은 이어지는 브라질전에서도 득점을 해내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우루과이는 다음 경기인 아르헨티나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하며 초대 남미 챔피언십 우승자가 된다. 그로딘은 3경기 3 득점을 기록하며 대회 득점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3. 1916 이후


1917 남미 챔피언십에선 단 한경기도 출전하지 못했으나, 우루과이는 대회를 우승했다. 1918년의 페냐롤에서는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을 우승하며 자국 정상에 서기도 했으며 1919년 남미 챔피언십에선 전 경기를 뛰었고,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을 상대로 득점을 기록하며 조국의 결승 진출을 이끌었으나, 결승에서 기나긴 150분 혈투 끝에 브라질에게 패하고 만다.
 
1921년에도 프리메라 디비시온을 우승하며 우루과이의 정상에 섰으나 우루과이 축구 연맹과의 갈등으로 인해 페냐롤을 떠나게 되고, 육상 종목에 좀 더 집중하고 올림피아 FC에서 축구 또한 병행하며 7년가량의 기간을 활동해 아틀레티코 리버플라테의 창단에 기여하고 은퇴하게 된다.


4. 은퇴 이후


은퇴 이후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여전히 가난한 삶을 버텨야 했으며 1944년에 중병에 걸려 입원하게 된다. 12월 17일에 1944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을 우승한 페냐롤 팀 전원이 바로 병원을 방문해 그라딘에게 우승을 바쳤으며 나흘 뒤에 그로딘은 세상을 떠난다.


이사벨리노 그라딘은 월드컵 이전엔 우루과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로 거론되던 선수로, 흑인 특유의 탄력 있고 폭발적인 신체 능력으로 유명했다.
 
 
날카로우면서도 정확한 크로스와 파괴적인 왼발을 갖추고 있었으면서 양발을 잘 사용했다. 특히 속도가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축구와 육상을 병행하며 활동했음에도 육상으로도 남미 최정상을 타이틀을 얻었다.
 
육상 타이틀을 나열해 보자면


1918 우루과이 육상대표 선발전 200M 동메달, 400M 금메달

1919 남아메리카 육상 선수권 200M, 400M 금메달

1920 남아메리카 육상 선수권 200M, 400M 금메달 (200M 22.4초 대회 레코드)

1922 라틴 아메리카 육상 선수권 400M 금메달 (비공식)


남미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성적이었다.
 
그라딘은 흑인 축구선수의 시초와도 같으며, 당시 우루과이의 선진적이고 평등한 태도와 스포츠계의 인종의 평등함을 상징하는 존재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 옵둘리오 바렐라부터 우루과이 대표팀 수비의 한축을 맡고 있는 로날드 아라우호 등의 우루과이 흑인에서 나아가 디디, 펠레 등 남미의 흑인 축구 선수들이 그라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성기에 '하얀 영혼을 가진 흑인'이라는 백인우월주의적 사상이 녹아든 별명을 얻었으나, 그 내용엔 이 경이로운 흑인을 존경하는 이들의 찬사만이 가득 했음을 부정하긴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