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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 푸슈카시 페렌츠
포지션: 인사이드 포워드
국적: 헝가리, 스페인
출생일: 1927년 4월 2일
클럽 경력:
1943 - 1956 부다페스트 혼베드
1958 - 1966 레알 마드리드
통산 경기: 약 720경기 (헝가리 국가대표 팀 약 85경기)
1. 푸르첼드 페렌츠
1927년 4월 2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의 독일인 가정에서 푸르첼드 페렌츠가 태어난다. 그와 같은 이름을 지니고 있던 그의 아버지는 독일인(다뉴브 슈바벤인)이었으며 축구선수였다. 시간이 지나, 축구선수를 은퇴한 아버지는 푸르첼드가 10살이 되던 해에 헝가리식으로 이름을 개명했고, 그에 따라 푸르첼드 페렌츠또한 푸슈카시 페렌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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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영향으로 아주 갓난아기 시절부터 축구를 접한 푸슈카시는 키슈페스트에서 성장하며 잉글랜드의 찰리 부찬, 테드 드레이크 스페인의 리카르도 사모라 등의 스타들에 대한 동경심을 지닌 채로 또래 아이들과 축구를 즐겨했고 이 과정에서 한 친구를 사귀게 되는데, 그가 후에 푸슈카시와 함께 혼베드와 '황금의 팀'에서 활약하게 되는 보직 요제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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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 본격적으로 축구선수의 꿈을 꾸기 시작한 푸슈카시는 자신의 아버지가 10년에 육박하는 세월을 헌신한 구단인 키슈페스트 AC의 유소년 팀에 합류했다. 3년 만에 1군으로 승격하며 데뷔해 냈으며 16세의 이른 나이부터 어른들을 상대한 푸슈카시는 '남동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 질주하는 소령과 '골든 팀'
1945년, 아버지가 팀의 감독이 된 시점부터 더 많은 기회를 부여받아 시즌 후반기에 팀의 순위를 끌어올리는 활약을 보였고, 국가대표 데뷔까지 해냈다. 1945-46 시즌부터 재능을 만개하기 시작한다. 인사이드 포워드였던 푸슈카시는 34경기에서 36 득점이란 빼어난 퍼포먼스를 보였으며 1946-47 시즌엔 푸슈카시의 아버지가 경질당하고 구트만 벨라가 팀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푸슈카시는 주춤하기는커녕 29경기 32 득점으로 연속해서 출전 경기 수 보다 많은 득점을 기록하며 팀을 구단 역사상 두 번째이자 최고 성적인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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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음 시즌엔 31경기에 출전해 50 득점이란 경악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헝가리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다. 그러나 시즌 종료 후 구트만은 푸슈카시와의 불화로 인해 팀을 떠나야 했고, 푸슈카시의 아버지가 다시 지휘봉을 쥐었다.
1949년에 키슈페스트는 헝가리 국방부에 인수되며 부다페스트 혼베드로 구단명이 바뀌었고 푸슈카시는 소령이 되었다. '질주하는 소령'과 함께 구단 최고의 전성기는 시작되는데, 1949-50 시즌부터 푸슈카시는 헝가리 득점왕을 해내며 구단에게 첫 헝가리 리그 우승을 안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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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졸탄 치보르, 코치시 산도르, 로란트 줄라, 부다이 라슬로, 그로시치 줄라 등의 헝가리 최고의 재능들이 징집되며 부다페스트는 최강의 선수진을 구축했고 푸슈카시는 헝가리 리그 득점왕 2회, 우승을 4회를 더 이루었다.
부다페스트의 국유화는 동시에 헝가리 대표팀의 성공으로 연결됐다. 헝가리 대표팀은 1952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며 푸슈카시는 8강에서 2 득점, 준결승에서 1 득점을 기록했으며, 결승에선 유고를 상대로 페널티 킥을 실축했으나 득점에 성공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중유럽 인터내셔널 컵에선 10득점을 기록해 대회 득점왕을 차지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푸슈카시를 주축으로 둔 '황금의 팀' 헝가리는 시대를 뛰어넘은 최강의 국가대표팀으로서 축구계를 지배했다. 특히 원정과 홈에서 잉글랜드를 압도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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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선 골절을 안고 결승전을 포함해 전경기에서 4득점을 기록했으나, 이질적인(조 1위가 1위와 맡붙는) 대진방식으로 인해 결승에서 서독을 상대로 '베른의 기적'의 희생양이 됐다. (후에 서독 선수들의 약물 의혹이 붉어졌으나, 당시에는 약물 관련 규정이 없었다.)
3. 새로운 터전을 찾아서
푸슈카시와 함께한 헝가리는 1949년부터 1956년까지 62전 50승 9무 3패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1956-57 시즌, 혼베드가 유러피언컵 스페인 (아틀레틱 빌바오) 원정에서 패배하고 귀국하기 전, 1956 헝가리 혁명이 발발했고 헝가리가 이를 소련의 군대를 이용해 난폭하게 저지하자 푸스카스, 졸탄, 코치시가 망명하였고 결국 팀은 무너져 내린다. 헝가리의 전성기의 시작과 끝은 정치와 함께했다.
푸슈카시는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향했고 이후 아내와 딸이 몰래 헝가리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면서 오스트리아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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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푸슈카시는 헝가리에게 탈영을 한 국가 반역자로 간주되어 25년간 헝가리로 귀국 금지 형이 내려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FIFA는 푸슈카시에게 18개월 출전 금지령을 내렸고 푸슈카시는 AC 밀란과 유벤투스, 뮌헨 참사로 피해를 입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비롯한 강호들의 관심을 이적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몰래 국경을 오스트리아로 이주한 푸슈카시는 비엔나의 위너 스포츠 클럽에서 훈련을 하며 몸을 유지하려 했다. 후에 이탈리아로 이주하고 출전 금지령 기간이 끝난 뒤에 세리에에서 이적할 팀을 찾았으나, 당시 그의 나이 30이었으며 한창 때도 살집이 있던 푸슈카시였던지라 몸상태에 대한 구단들의 우려로 인해 실패했다.
한편 스페인의 강호 레알 마드리드는 푸슈카시가 망명 중이던 1956년에 혼베드와 친선경기를 치렀으며,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은 혼베드의 감독직을 수행 중이던 에밀 외스트레이허를 기술 고문으로 영입했다. 외스트레이허는 푸슈카시의 영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이탈리아로 날아가 레알 마드리드 이적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3. 흰 제복을 입은 소령
결국 푸슈카시는 헝가리 국가대표 동료였던 졸탄, 코치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으로 이주했고, 그들이 쿠발라 라슬로의 설득으로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것 과는 반대로 외스트레이허의 설득으로 인해 레알 마드리드행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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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유러피언컵 3연패를 달리고 있던, 유럽 축구의 정점에 있던 팀이었으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파코 헨토-레몽 코파-푸슈카시 페렌츠라는 막강한 공격진을 구성했다. 알프레도 디스테파노를 비롯한 이들의 의심의 눈초리는 존재했으나 이렇다 할 적응기는 필요 없었다. 레알 마드리드 이적 후 두 번째 경기였던 스포르팅 히혼 전에서 헤트트릭을 포함해 푸슈카시는 첫 시즌부터 헤트트릭만 4번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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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의 실세였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친밀한 관계를 가져 좋은 궁합을 보였고 팀의 유러피언 컵 결승 진출에 공헌했으나, 결승전 장소가 독일 슈투트가르트였던지라 푸슈카시는 출전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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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슈카시의 제2의 전성기는 1959-60 시즌부터 시작되었다. 리가 24경기 25 득점을 기록했고 유러피언컵에선 7경기 12 득점, 그중 프랑크푸르트를 상대로 결승전에서 4 득점을 기록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유러피언 컵 5연패를 이끌었다. 피치치와 유러피언컵 득점왕 타이틀을 얻었고, 인터 컨티넨탈컵에서도 페냐롤을 상대로 2 득점을 해내며 전대회 36경기 출전 47 득점을 기록했으며 발롱도르 2위에 랭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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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61 시즌엔 엘 클라시코 두 경기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했고 리가 28경기 28 득점을 기록하며 피치치를 수상 받았고 리 우승을 이끌었다 이듬해엔 40경기 40 득점을 기록하며 레알 마드리드에게 리그 우승과 15년 만의 코파 델 레이 우승을 해냈으며 벤피카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도 이끌었지만 에우제비오의 벤피카에게 패했다. 구단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결승에서의 패배였지만 헤트트릭을 기록한 푸슈카시는 빛났다.
스페인 국적을 취득한 푸슈카시는 이 시기에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의 부름으로 스페인 국가대표에 합류했으며 1962 칠레 월드컵에도 참가했으나, 스페인은 16강 조별리그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1962-63, 1963-64에도 피치치를 수상 받으며 레알 마드리드를 리가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1964-65 시즌엔 득점력이 급감했으나 여전히 양질의 플레이를 선보이며 38의 나이에 발롱도르 13위로 랭크되었다. 1965-66 시즌은 푸슈카시의 마지막 시즌으로, 14 경기만을 출전했으며 아만시오 아마로를 비롯한 선수들의 활약으로 유러피언컵 우승을 달성했고 푸슈카시는 유종의미를 거두게 된다.
푸슈카시 페렌츠는 최고의 플레이메이커이자, 스트라이커였다. 건장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매우 민첩했으며 공간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났다. 왼발 강슛은 푸슈카시의 트레이드 마크로, 스위스 월드컵에서 푸슈카시를 상대한 홍덕영 골키퍼가 말하길 갈비뼈가 부러질듯한 고통을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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