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크라이프, 디에고 마라도나, 호나우두 나자리우, 호나우지뉴, 리오넬 메시, 네이마르 주니오르 그리고 현재의 로베르토 레반도프스키.
1899년에 창단된 FC 바르셀로나의 1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선 무수히 많은 '슈퍼 스타'와 레전드들이 존재했다.
오늘 소개할 선수는 그런 바르셀로나 구단 초창기 레전드이자, 최초의 스타로 소개되며 'El Rompe Redes (엘 롬페 레데스, 골네트 파괴자)' 란 별명으로 유명한 선수다.
풀네임: 파울리노 알칸타라 리에스트라
포지션: 인사이드 포워드
국적: 스페인
출생일: 1896년 10월 7일
클럽 경력:
1912–1916 바르셀로나
1916–1918 보헤미안
1918–1927 바르셀로나
통산 경기: 460 경기 (카탈루냐 국가대표 10경기, 필리핀 국가대표 5경기, 스페인 국가대표 5경기)
1. 첫 만남
파울리노 알칸타라는 필리핀 일로일로 주에서 스페인 군인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게 된다. 7 자매 중 막내였다.
알칸타라의 가족들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이사했을 때 그의 나이는 3살이었고(8살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 해에 조안 감페르가 축구 클럽 바르셀로나를 창립한다.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되며 FC 갈레노에 입단할 예정 이었던 알칸타라는 조안 감페르에게 발견되어 갑작스례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에 합류한다.
1912년 2월 25일에 열린 캄피오나 데 카탈루냐에서 카탈라 SC를 상대로 캄프 데 인두스트리아에서 데뷔한다. 당시 그의 나이 15세 4개월 18일로, 이는 바르셀로나 역대 최연소 출장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경기에서 바르셀로나는 9-0로 대승을 했고 알칸타라는 데뷔전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했다. 이 경기에서의 득점또한 바르셀로나 역대 최연소 득점이라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카탈루냐 국가대표 팀에도 차출되어 1915년, 바스크 국가대표를 상대로 데뷔했다. 또한 아스투리아스 왕자 컵 첫 대회의 개막전에서 센트로 팀(카스티야, 마드리드 팀)을 상대로 대회 사상 첫 골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토너먼트 우승을 하진 못했다.
바르셀로나에서 프란시스코 브루 산즈, 잭 그린웰, 로마 포른스 등의 동료 선수들과 함께 파레네 컵 2연패(1912, 1913) , 코파 델 레이 우승 (1913), 캄피오나 데 카탈루냐 2회 우승(1913, 1916) 등의 업적을 남긴다.
2. 바르셀로나 첫 황금기를 열다.
1916년, 알칸타라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돌아간다. 보헤미안에 입단하여 축구와 의학을 병행하였고 보헤미안의 필리핀 챔피언십 2연패(1917, 1918)를 이끈다.
이 과정에서 알칸타라는 필리핀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고 극동 선수권 대회 일본전에서 2득점과 뛰어난 활약을 펼차며 필리핀의 15-2의 대승을 이끈다. 이는 필리핀 축구 국가대표팀의 가장 큰 대승이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최다 실점이다.
한편 알칸타라의 친정팀인 바르셀로나는 그의 부재로 인해 주요 대회 우승에 실패했고, 알칸타라의 부모에게 알칸타라의 스페인 복귀를 간청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1917년에 말라리아에 걸린 알칸타라는 바르셀로나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해 줄 때까지 처방약 복용을 거부하는 등 때를 썼고 그렇게 친정팀 바르셀로나로 복귀한다.
힘들게 돌아온 바르셀로나에서의 재시작은 그다지 순조롭지는 못했다. 알칸타라의 전 동료이자 당시 바르셀로나의 감독이었던 잭 그린웰은 알칸타라를 수비수로 두는 실험을 한 것이다. 보기 좋게 실패했고 결국은 다시 포워드 진영으로 돌아갔다.
1919년엔 바르셀로나에게 또 한 번 캄피오나 데 카탈루냐의 우승을 안겨줬다. 또한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도 진출했으나, 아레나스 클루브의 펠릭스 세수마가에게 헤트트릭을 당하며 2-5로 패배했다. 후에 세수마가는 바르셀로나에서 동료로 만나게 되기도 한다.
여담으로 1919년 4월 13일 신구장이었던 캄프 데 레스 코르츠에서의 레알 소시에다드와의 경기에서 알칸타라가 강력한 슛을 찾는데, 그것이 골대 주변을 순찰하던 경찰에게 맞았고 경찰이 공과 함께 네트 안으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당시 알칸타라의 나이가 아직 20살 이란 걸 생각해본다면 정말 경이로운 슈팅 재능이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찾아온 1920년. 1920년은 바르셀로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해 중 하나로 평가되는데, 알칸타라는 주제프 사미티에르, 에밀리오 사지 리냔, 펠릭스 세수마가, 리카르도 사모라 등의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걸출한 멤버들과 합을 이루며 캄피오나 데 카탈루냐와 코파 델 레이 둘 다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업적이 높게 평가되어 알칸타라는 사모라, 사미티에르, 세수마가 등의 동료들과 함께 1920 앤트워프 올림픽 스페인 대표팀으로 선발되었으나 알칸타라는 마지막 의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 집에 머물기를 택했고 결국 알칸타라가 빠진 스페인은 8강에서 대회 우승을 차지하게 되는 벨기에에게 탈락한다.
덕분에 알칸타라는 1921년 10월 7일에 스페인 대표팀에 데뷔하게 되었다. 기대에 보답하듯 데뷔전에서 2 득점을 기록하며 스페인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3. 골 네트 파괴자
1922년엔 다시 한번 알칸타라에게 슈팅 관련 일화와 함께 별명이 생기게 되는데 프랑스와의 경기에서의 알칸타라가 찬 슛이 그만 골망을 찢어버렸고, 이후 사람들은 알칸타라를 'El Rompe Redes (엘 롬페 레데스, 골네트 파괴자)'란 별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1920년은 바르셀로나의 첫 황금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해였고 알칸타라는 바르셀로나 2기에서 황금기 멤버들과 캄피오나 데 카탈루냐 8연패(1919, 1920, 1921, 1922, 1924, 1925, 1926, 1927)와 코파 델 레이 4회 우승(1920, 1922, 1925, 1926) 등의 업적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1927년 7월 3일 파울리노 알칸타라는 의사가 되기 위해
31살의 나이로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알칸타라는 바르셀로나의 첫 황금기의 상징이었고 바르셀로나 2기에서 399경기 395 득점이라는 경기당 1 득점에 육박하는 득점력을 자랑하는 선수였다. 바르셀로나에서의 그의 득점 기록은 약 100년의 시간이 지나, 2014년에 구단 최고의 선수가 될 '리오넬 메시'에게 깨지게 된다.
'파울리노 알칸타라'라는 선수가 가지는 바르셀로나에 대한 상징성과 의미는 실로 대단하다.
그리고 아시아 선수로 평가하기에 애매한 부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핀과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으며 특히 알칸타라에 대해 알려지고 필리핀의 축구 인기가 급증하기도 했다고 한다.
2018년에는 필리핀 풋볼 리그의 국내 컵 대회가 '코파 파울리노 알칸타라'로 명명되기도 하고 2021년엔 필리핀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지명되는 등 필리핀에서도 굉장한 상징성과 인기를 가지고 있다.
바르셀로나 최초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바르셀로나 최초의 슈퍼 스타.
이 작고 깡마른 체격의 선수가 보여준 강력한 슈팅들과 경이로운 업적들은 필리핀과 바르셀로나를 포함한 전세계의 축구 팬들이 기억할 것이다.